(36)추석

 

올 여름 잠깐만 일을 해도 등에 땀이 차오르고, 일 좀 했다 싶으면 땀이 비 오듯 했다. “덥다 더워” “더워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던 더위가 처서(處暑)가 지나자 돌변했다. 새벽으론 쌀쌀해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다.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가고,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추위에 약한 모기가 힘이 없어 잘 물지 못하고,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농촌에서는 사료용으로 목초를 베어 말리고, 조상 묘 벌초를 한다. 농기구인 쟁기와 호미도 깨끗이 씻어 갈무리한다. 이 즈음이면 추석이 코앞이다. 어릴적 추석이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많이 줄어들긴 했어도 추석은 명실상부 민족 최고의 명절이다.

제철음식 먹는 것만으로도 ‘만병통치’
적당히 찐 살은 다가올 추위 이겨내고
면역력 높여 환절기 감기 예방에 좋아

추석은 중추절, 가배, 가위, 한가위라고도 부른다.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천고마비의 좋은 절기로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수확의 계절이다. 옛 풍습에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지점에서 만나 반나절을 함께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으며 즐기는 것을 반보기라 했다. 추석을 전후해선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동안 친정 나들이를 했다. 당시 여성들에게 큰 기쁨과 위안을 주는 풍습이었지만 요즘은 오히려 늘어나는 가사로 주부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날이 되었다. 올해 추석에는 신나게 음식을 장만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먹고 스트레스를 훅 날려버리면 좋겠다.

수확한 참깨나 들깨로 짠 참기름은 나물을 무치고, 들기름을 둘러 노릇노릇 부쳐내는 전의 고소한 냄새는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넉넉하게 준비해 차례 음식을 만들고 남은 반죽으로 식구들이 먹을 김치전을 부칠 때면 돼지비계로 솥뚜껑을 문질러 구워냈는데 잔칫날처럼 신명이 났었다. 육전인 동그랑땡, 어전인 동태전, 삼색산적, 소고기산적. 통째로 삶아낸 닭…. 지금 아이들은 잘 먹지 않지만 필자가 어릴 땐 명절 때가 아니면 먹어보기 힘든 음식들이었다.

추석 대표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송편이다. 햇곡식으로 빚어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며 차례 상에 올린 떡이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어야 시집도 잘 가고 예쁜 아이를 낳는다는 말에 어린 나이에도 누구 떡이 예쁜지를 서로 경쟁하듯 했던 기억이 난다. 솔잎과 함께 떡을 찌기 때문에 송병(松餠) 또는 송엽병(松葉餠)이라고도 했다. 깨, 팥, 녹두, 밤 등이 소로 사용되어 소에 따라 맛이 다른데 나는 콩떡과 깨떡을 좋아했다. 입맛은 고만고만해서인지 다들 콩떡과 깨떡을 골라먹기 위해 싸우고 했던 것 같다.

차례 상에 올리는 과일이 조율이시이며 대추, 밤, 배, 감이다. 대추(棗·조)는 씨가 하나라 임금을, 밤(栗·율)은 한 송이에 3톨이 들어 있어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3정승(政丞)을, 배(梨·이)는 씨가 6개 있어서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 6조판서를, 감(柹·시)은 씨가 8개 있어 우리나라 팔도를 각각 상징한다는 속설이 있다.

대추는 비타민C가 많이 들어있고, ‘보고도 안 먹으면 늙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몸에 좋다. 밤은 탄수화물과 단백질, 비타민이 풍부하고 칼슘, 철, 칼륨 등의 좋은 영양원이 된다. 배는 칼륨이 풍부해 고혈압에 좋고 펙틴(pectin)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고지혈증 예방에 좋다. 감은 타닌(tannin)의 일종인 디오스프린 성분이 있어 혈관을 강하고 깨끗이 해주고, 스코폴레틴 성분은 콜레스테롤을 낮춰주는 효능이 있다.

▲ 윤경희 현대그린푸드 현대자동차 메뉴팀장

제철이 아니면 보기도 어려웠던 과일은 차례 상에 진설하기 위해 깎은 껍질을 서로 먹으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차례 음식은 명절이 끝나갈 때쯤 남은 음식으로 간국을 끓여먹기도 한다. 간국이 올라오면 명절도 끝이 난다. 그때쯤 주부들의 가사노동도 끝이 나겠지만 기름진 음식을 과식해 늘어날 뱃살 걱정과 스트레스가 다가온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차례 상에 올라간 햇과일 속에는 성인병 예방에 효능이 있는 성분이 가득하다. 신토불이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 농산물 속에는 제철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만병통치라 했다. 적당히 찐 살과 지방은 앞으로 다가올 추위를 이겨내고 면역력을 높여 환절기 감기예방에 좋다. 한가위만 같길 바라던 마음은 건강한 삶을 위한 조상들의 생활 속 지혜이고, 힘들지만 거하게 한상 차려지는 차례 상은 삶의 미학이라 생각해 본다.

윤경희 현대그린푸드 현대자동차 메뉴팀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