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의 남자가 사이버 바둑에 빠졌다. 퇴근하고 나서 밥도 먹은둥 마는둥 컴퓨터 앞에 앉으면 자정을 넘길 때가 허다하다. 한 판만 더, 한 판만 더, 하다가 어떨 땐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해 아내를 불안하게 했다.  "어제는 마지막 대국에서 내가 반 집 차이로 졌는데 오늘은 반드시 복수해야지. 그런데, 그 여자 정말 바둑 잘 두던데... 얘기도 잘하고."  잦은 술자리에 끌려 다니는 것보다는 컴퓨터가 낫겠다 싶어 가만히 참고 있던 그의아내는 어느날 남편의 맞수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심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그녀는 맹렬한 질투를 느꼈다. "당신, 혹시 그 여자랑 연애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무식한 마누라 취급할까봐 입을 닫았다.  며칠을 고민하던 그녀는 인근 학원에 정식으로 등록해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장난삼아 두던 오목 실력이 바탕이 되었는지 몇 달 배우니까 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그녀는 남편과 나란히 앉아 사이버 바둑을 즐긴다. 독수리 타법인 남편은 글이 늦어 고민이었는데, 1분에 2백타를 날리는 아내가 재치있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덕분에 게임방의 왕이 되었다. 그의 아내는 무료한 낮 시간에 오목이나 사이버 바둑을 두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건 아니지만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은 대단했다. 또래 여자들이 빈둥지 증후군으로 우울증을 겪는 걸 보면서 그녀는 인터넷이 자신의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얼마전 매스컴을 통해 채팅에 빠진 주부가 불륜을 의심하는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아침에 물린 밥상을 저녁까지 치우지 않을 만큼 그녀는 채팅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가정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갈 만큼 어딘가에 빠져 있었다면 분명큰 잘못이다. 그러나 이 경우, 남편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몹시 궁금하다. 치우지 않은 밥상을 말없이 거두어 설거지하고 아내를 불렀으면 어땠을까? "여보, 채팅도 좋지만 밥이나 먹고 해."  아마 그랬다면 그 여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 이상 채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말리면 더 하고싶은 게 사람 심리다. 채팅이란 것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지겨워지니까 그때까지 예의주시하면서 아내가 현실로 돌아오도록 회유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이버 바둑에 빠진 남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그 속에 뛰어든 여자, 채팅에 빠진아내를 추궁하다 죽음을 당한 남자, 어느 편이 더 슬기롭고 현명했을까?  정보화시대가 가속되면서 사회 곳곳에서 인터넷의 역기능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문서 이전에 사람이 만나야 결재가 원활하다며 전자결재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인터넷이 필수가 되었고 사이버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가고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터넷에 대한 역기능, 특히 일부 여성들의 일탈에 대한 매도를 지나치게 부각시키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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