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59)고기업과 서일교 장관

▲ 고기업 울산읍 의장(둘째 줄 오른편에서 4번째)을 비롯한 울산 읍의회 의원들이 1952년 초대 울산읍의회 개원 후 차용규(둘째 줄 오른편에서 5번째) 당시 읍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영출 전 울산문화원장이 둘째 줄 맨 왼편에 보인다.

5대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고기업씨가 중도에 출마를 접은 것은 순전히 사위 서일교씨의 권유 때문이었다. 고씨는 출마 전 울산읍 의장과 읍장을 지내 울산 현안에 밝았고 양조장을 경영해 재력도 탄탄했다.

조직 역시 울산읍 의장과 읍장을 지내면서 많은 인맥을 만들었고 특히 양조장 식구들을 선거에 가동할 수 있어 막강했다. 그러나 고씨는 이 때 이미 나이가 59세로 다른 후보들에 비해 연로했다.

고씨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그런데 장남 태진씨 아래로 태어났던 두 딸은 시집가기 전 타계했고 셋째 딸 명혜가 서일교씨에게 시집갔다. 따라서 고씨는 명혜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고 이 사랑이 사위에게도 연결되었다.

장남 태진씨와 친했던 서일교씨
고기업씨 막내딸 명혜씨와 결혼
장인의 총선 출마 만류한 대신
영화사업 권유, 큰 돈 벌게해
총무처 장관으로 있던 서씨
울산지법·지청 개원도 앞당겨

서씨가 부인 명혜씨를 알게 된 것은 오빠 태진씨를 통해서다. 일제 강점기 서씨는 경성제대 법대를 다녔고 태진씨는 부산상고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 츄오대학(中央大學)을 다녔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대학생들은 방학 때면 서울에서 모여 시국강연회를 열고 때로는 축구시합도 가졌다. 이 때 1921년생으로 동년배였던 태진씨와 일교씨가 서로 친하게 되었다. 태진씨는 대학시절 공을 잘 찼고 3공화국 시절 조흥은행장으로 있을 때는 대한축구협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처럼 둘이 친하다 보니 서씨가 울산 고씨 집에 오는 일이 잦았고 고씨의 여동생을 눈여겨 본 서씨가 명혜씨에게 반해 둘이 결혼했다.

장인 고기업씨가 5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서씨는 우리나라 법조계에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대구 출신의 서씨는 특히 법 이론에 밝아 해방 후 민복기 대법원장과 함께 그때까지 일본용어가 많았던 우리나라 법을 우리용어로 고치는 등 일본잔재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서씨가 고기업씨의 출마를 말린 것은 장인의 성격과 능력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인이 정치가보다는 경제인이 될 때 더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 고씨는 일제강점기 차용규씨가 운영했던 양조장을 인수해 울산을 대표하는 경제인이 되어 있었다.

4대 총선에서 울산에서 벌어진 정해영과 김성탁씨의 이전투구를 지켜보았던 서씨는 장인이 이런 막가파식 선거판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5대 총선은 민주당 후보가 아닐 경우 당선이 어렵다는 것과 특히 정치는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속성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런 점을 내세워 장인에게 출마 포기를 권유했고 고씨가 이를 받아들였다. 고씨가 쉽게 출마를 포기한 이면에는 아들 태진씨의 권유도 있었다. 이 때 금융인으로 있었던 태진씨 역시 서씨와 함께 아버지의 출마를 적극 만류했다.

서씨는 출마를 포기한 장인에게 얼마 있지 않아 황금알을 안겨주었다.

울산은 1962년 시 승격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공단지역이 되어 팔도에서 근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때 서씨가 장인 고씨에게 권유한 것이 영화 사업이었다.

해방 후 서씨 집안은 대구에서 영화관을 운영해 재미를 보았다. 따라서 서씨는 울산에 근로자들이 많아지면 영화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사업을 권유했다.

고씨는 사위로부터 권유를 받기 전 이미 영화사업의 경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울산에서는 일본인 니시무라(西村)가 울산극장을 지어놓고 영화상영을 해 재미를 보았다. 그런데 해방과 함께 그는 이 영화관을 자신의 필름 기사로 활동했던 허용택씨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 영화관을 허씨가 맡아 운영했는데 이 때 울산 유지였던 고씨가 다른 7명과 함께 울산 영화관의 주주로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해방 후 학성동에 시민관이 있었다. 당초 이 건물은 울산군이 회의장으로 사용했지만 얼마 후 전해진씨가 임대해 영화를 상영했다. 이 때도 직간접으로 고씨가 참여했다. 시민관이 개관 기념으로 상영했던 영화가 김승호 주연의 ‘촌놈 오복이’였다.

당시 시민관은 부산에서 필름을 가져와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 때 ‘촌놈 오복이’ 필름을 부산에서 가져왔던 사람이 지난해까지만 해도 성남동에서 ‘WW갤러리’를 운영했던 강정길씨였다. 당시 강씨는 부산 중앙동에 있던 체육관에서 매일 운동을 했는데 이 때 운동선배가 필름 한통을 주면서 시민관에 전달해 주고 오라고 해 기차를 타고 울산까지 와 필름을 주고 갔는데 이 필름이 ‘촌놈 오복이’였다고 강씨는 회상했다.

고기업씨는 1964년에 태화극장을, 그리고 1968년에는 천도극장을 세웠다. 서씨의 예언대로 영화 사업은 히트를 쳤다. 당시만 해도 오락이라고는 없던 시절 근로자들이 매일 밤 영화관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갈데없는 막일꾼들까지 영화관에 모여들었고 설과 추석에는 근로자들이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쇼를 공연할 때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정원의 3~4배가 넘는 관객들을 입장시켜 돈을 끌었다.

서씨가 울산을 위해 한 가장 큰 업적이 울산지법과 지청 개원을 앞당긴 것이다. 울산은 1962년 공업도시 지정으로 근로자들이 모여들면서 각종 청소년 범죄가 발생했다. 특히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어 이를 어긴 사람들 중 즉심에 넘겨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울산에 지법과 지청이 없다보니 이런 경범죄자들이 매일 아침 부산까지 가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경범죄자들은 이 때 소위 ‘닭장차’에 실려 부산 서대신동까지 가서 재판을 받고 돌아왔다. 당시 울산에도 법정은 있었다. 당시 울산 법정은 울산경찰서 뒤 현 중부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이 때 이곳에 등기소가 있었는데 이 건물 한편을 법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법정은 정식 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당시 재판은 부산에서 울산에 온 판검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이 때 재판은 소위 ‘순회재판’이라고 해 판사와 검사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올라와 재판을 하다 보니 재판 자체가 미루어지는 일이 잦아 그 만큼 불편이 많았다.

재판 과정이 이처럼 복잡하다보니 재판 준비는 당시 울산경찰서에서 했는데 담당 경찰의 재량권이 많았다. 당시 즉심은 이병우 정보과장이 주로 맡아 처리했다. 울산 출신의 이씨는 이 무렵 단순히 정보과장의 일만 본 것이 아니고 울산에서 일어나는 중요 정보를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공유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울산의 지체 높은 사람들 중에는 각종 형사 사건과 관련, 자녀와 친인척 문제로 그에게 선처를 부탁하는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이씨가 도움을 주곤 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고씨를 비롯한 울산 유지들이 울산에 지원과 지청 개원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정부에 올린 것이 70년대 초다. 이 때 서씨가 총무처 장관으로 있어 고씨를 비롯한 울산유지들이 서울로 가 서씨에게 지법과 지청의 조기 개원을 여러 번 요청했고 서씨가 이런 유지들의 뜻이 반영될 수 있도록 정부 관련 부서에 지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울산에 지법과 지청이 남구 옥동에 문을 연 것이 1982년이다.

영화관과 함께 고씨가 오랫동안 운영했던 울산양조장에서는 70~80년대 울산 경제의 중추적 인물이 되는 상공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우선 고씨 스스로 울산상공회의소 건립에 참여, 1~3대 회장을 지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울산양조장에서 술 판매와 수송을 맡았던 김기수씨는 공장에서 나온 후 남구 달동 현 세이브 존 앞에 이용사를 차려 큰돈을 벌었다. 자동차 부속품을 팔면서 정비도 함께 한 이용사가 크게 성공하자 김씨는 그 돈으로 당시로서는 최신 대형 호텔인 태화호텔을 건립했고 이를 발판으로 7~8대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씨는 나중에 현 세이브 존 자리에 모드니 백화점을 세워 울산에 본격적인 백화점 시대를 열기도 했다.

울산양조장에서 총무로 활동했던 허철씨도 신정동에 태화공업사를 연 후 자동차 정비로 큰돈을 벌었다. 이 회사 터는 최근 아파트 업자에게 팔려 아들 재원씨가 다른 부지를 찾고 있다. 허철 씨는 사업 성공과 함께 선출직인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회계가 밝아 울산양조장 회계 업무와 영화관 업무까지 함께 보았던 오해룡씨 역시 반구동에 자동차 정비업체인 동신공업사를 차려 큰돈을 번 후 나중에는 울산시의회 의장까지 지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