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동학사상(東學思想)

▲ 울산시 중구 유곡동에는 수운 최제우가 초가를 짓고 수도생활을 한 유허지가 있다. 최제우는 1855년 이 곳에서 이승(異僧)으로부터 천서(天書)를 받아 사흘만에 그 뜻을 깨치고 본격적인 구도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여시바윗골’로도 불리던 이 곳은 천도교의 성지로 전해오고 있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 경상일보 자료사진

동학은 19세기 봉건사회의 해체기, 한국의 근대 개화기에서 외세의 침입이 있고 국내정치의 혼란과 사회불안, 기성종교의 무력, 무능 등으로 실의에 빠진 민중들에게 희망의 빛이 됐다.

동학의 창시자는 경주에서 전통적인 유교(儒敎)가문에서 태어난 최제우로 원래이름은 복술(福述), 제선(濟宣)이었으나 제우(濟愚)는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서학에 대응할만한 동방 한국의 종교’ 의미로 최제우가 창시
19세기 문호개방에 따른 사회불안속 ‘보국안민’ 이념 토대로
신분제도 부정하고 ‘인내천’ 평등사상 펼쳐 민중의 지지 받아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11세 때는 조선후기의 어려움을 한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7세 즈음 부친의 사망으로 부모님 모두를 여의고 조선각지를 유람했다. 이 때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당시에 서학(西學)이라 했던 천주교, 무속, 정감록 등 민족고유 신앙과 비기도참사상 등 다양한 공부를 접하게 됐다.

당시엔 세도정치와 부패한 양반계급의가혹한 횡포 그리고 그들의 착취에 백성들이 신음하고 서양의 종교와 그 세력들이 밀려들어 압박받는 사회풍조와 기성종교의 부패로 민심의 불만과 혼란이 심화되고 있었다.

동학은 신흥종교로서 서학에 대응할만한 동토(東土)한국의 종교라는 의미로 시작했지만 동시에 사상으로서 개인의 사리(私利)가 아니라 공동의 공익(共益)을 중시 여겼다.

양반중심의 신분제 질서는 17세기 이후 무너지기 시작해 19세기 중반에는 심각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러한 내부적 어려움 위에 외세의 침투로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서양인들의 문호개방에 외압을 받는 과정에서 정치적 불안과 위기의식은 높아만 갔다.

내우외환의 위기적 상황에서 최제우는 삶의 의미와 방향을 상실한 민중들에게 삶의 주체의식과 자아에 대한 각성 그리고 국가의 안보와 민중을 위한 길을 인도 했다.

동학은 시대적 요청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나라 민족주의의 정신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시대적으로 민중들이 역사와 나라의 주체임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을 역사의 주역으로 이끌어 냄으로서 근대적 민족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제세구민(濟世救民, 세상을 구제하고 어려움에 처해져 있는 백성들 구제함)의 지론으로 민족고유의 신앙을 제창하고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 선(仙)의 교리를 바탕으로 했다. 즉 유교의 윤리, 불교의 견성각심(見性覺心), 선교의 양기양생(養氣養生) 등 모든 종교사상을 일이관지(一以貫之, 한 이치로 모든 것을 궤뚫음)해 그 근본을 파지해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의 사상을 펼쳤다.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념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과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민족주의사상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커다란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동학은 조선의 지배 논리인 신분 적서제도(嫡庶制度)등을 부정하는 현실적, 민중적인 교리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심했던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최제우가 말하는 시천주(侍天主)사상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초월적, 인격적인 상제(上帝)로서의 천주(天主)를 모신다는 의미(부모님처럼 하느님을 정성껏 받든다). 두 번째 인간에 내재하는 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의미(사람은 누구나 이미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최제우는 포교를 시작한지 3년만인 1864년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의 죄로 처형당하고 동학의 교회조직은 최시형이 2대교주가 되면서 확립됐다. 최시형을 통해 ‘사람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한다(事人如天, 사인여천)’는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되고, 인간은 물론 모든 자연의 산천초목에 이르기 까지 하늘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물물천 사사천(物物天 事事天)의 범천론적 사상(汎天論的 思想)이 널리 민중들의 마음을 잡았다.

또한 비밀리에 교조의 유문(遺文)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간행하여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를 확대 시켰다.

이 후에 최시형도 처형을 당하고 동학은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로 분열됐으며 3대 교주로 손병희가 되어 교리정비와 교세 확장에 노력했다.

손병희는 더 나아가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을 동학의 종지(宗旨, 주장이 되는 요지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로 선포했다.

동학은 유불선 3교가 합일한 것이라고 하여 우월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것을 통일하는 사상은 우리민족의 경천사상과 구제를 위한 민족적 염원이며 민간 신앙적 요소가 널리 민중들에게 동학의 신봉자를 갖게 해줬다.

또한 신분제 폐지와 모든 사람의 평등을 외치고 유교와 양반 중심 사회를 부정하는 반봉건적 성격도 민중을 자극하는 동기였다.

서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서양의 세력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위험한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척사(斥邪)다. 따라서 동학은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보국(保國)의 종교이며 안으로 안민(安民)의 사상으로 민족주의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1894년에는 조선봉건사회의 부정, 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을 시작으로 전북 고부농민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일어나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혁명의 씨앗은 이후에 1919년 삼일 독립운동과 1960년 4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동학은 과거의 민족수난과 치욕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혁명적 신앙과 자유와 평등의 민주적 사상을 고취 하고자 했던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이자 사상이다.

▲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동학에서 인내천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부패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인도나 중국의 문화사상을 배경으로 한 불교나 유교와도 다른 우리나라 종교라는 의미로 주체적 사상을 담고 있다.

오늘날에는 천도교로서 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종교의 개념보다는 한 줄기 사상의 큰 흐름으로 불합리성을 개혁하고자하는 민중들의 정신적 바탕이 되고 있다.

동학이 지향하는 민족주의 사상은 대립, 대결 지향적인 기존의 논리와는 다른 조화와 화합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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