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0)신교환과 인도네시아

▲ 신교환씨가 인도네시아 사업현장에서 바다 위 원목을 디딘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사진은 그의 자서전 <젊은이여 세계로 웅비하라>는 표지에 실렸다.

5대총선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 문을 두드렸던 신교환씨는 처음부터 승산 없는 선거전에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울산 갑구에서 그와 함께 경쟁을 벌인 김수선씨는 이미 초대와 3대 이 지역에서 출마해 지인들이 많았다. 또 다른 경쟁자인 최영근씨도 당시 국민들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았던 민주당 후보였기 때문에 그는 우선 지명도에서 이들에 뒤졌다.

이런 불리한 여건을 알면서도 신씨가 나선 것은 당시 정치권에 불었던 혁신계 바람과 무관치 않다. 혁신계는 해방 후 우리사회를 뿌리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결집된 정치단체였으나 이승만 때는 탄압을 받아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삼남면 하잠리 출신 지역교사로
일본 동경제대서 열대농학 전공
‘이민정책·수확의 다종화’ 주장
정책화 위해 출마했지만 낙선
인니의 한국기업과 한인들 도와
외교부 ‘역사속의 한국인’ 선정

4·19혁명이 일어나자 이들이 다시 모여 사회대중당을 만들고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서상일과 윤길중 등 비중있는 정치인이 참여했던 사회대중당은 창당 초기만 해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창당 과정에서 내분을 보여 5대 총선에서는 민의원 4명과 참의원 1명만 당선시켰을 뿐이다.

1927년 울주군 삼남면 하잠리에서 출생했던 신씨는 대구농림 졸업 후 일본 동경제대에 입학, 마을사람들이 천재라 불렀다. 대학에서는 열대농학을 전공했는데 2학년 때인 1944년 일본 해군장교로 징집당해 필리핀을 거쳐 인도네시아까지 갔다.

당시는 일본의 패전이 짙을 때였지만 그는 다행히 대학 청년들을 명분없는 전쟁에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장병들을 보호했던 일본 장교를 만나 살아날 수 있었다.

당시 전투에 참가한 대부분의 조선군들이 살아 돌아올 수 없었지만 신씨는 종전 6개월 후 고향 하잠리로 돌아와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언양중학 교사로 잠시 활동했던 그는 울산농고로 옮겨 생물을 가르쳤다. 언양중학에 있을 때는 역시 교사로 활동했던 송복순 여사와 결혼도 했다. 부인 송씨는 나중에 옥교동에서 대형 문구점인 학생사를 운영했다.

울산농고에서는 학생들을 상대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겪었던 전쟁 얘기를 자주했다. 특히 이곳에서 먹었던 열대 과일 ‘두리안’ 얘기를 많이 해 학생들로부터 ‘두리안’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교단에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대학에서 전공했던 농산물과 우리나라의 이민정책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그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민정책을 펼쳐야 하고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확의 다종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와 관련된 글을 썼다. 1961년 11월24일자 동아일보에는 ‘인구 팽창과 이민’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싣고 있다.

‘인구 밀도로 보면 남한은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어 호구지책이 힘들다.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22만명인데 반해 한해 늘어나는 인구는 100만명이 되지만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책이 없다. 이런 인구 증가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이민 밖에 없는 만큼 정부차원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

1962년 4월1일에는 동아일보가 ‘수확 많은 다모작’이라는 제목 속에 ‘해외 이민법의 통과와 이민교섭단의 현지답사로 해외 진출이 실현단계에 있다’고 강조한 후 ‘그동안 이민국인 브라질과 파라과이를 여러 번 다녀온 열대농업기술연구소장 신교환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면서 열대지방의 기후와 자연환경 특성을 신씨의 입을 통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신씨가 5대 선거에 출마한 것은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지만 4000여 표를 얻는데 그쳤다. 이후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1968년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서 손을 댄 사업이 합판 사업이었다. 그가 이민을 갈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산야가 헐벗어 국내에 소요되는 모든 목재는 외국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목재 수입국인 인도네시아에 목재전문 한국인들이 없다보니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중개상을 거쳐야 했고 이들의 횡포로 가격이 비쌌다. 그가 합판 사업을 한 것은 그 때 이미 인도네시아가 자원보호를 위해 원목 수출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합판 사업을 하면서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의 목재 수입을 도왔다. 1977년 동명합판이 수출 1억불 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의 도움이 컸다.

그가 그곳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을 많이 돕다보니 인도네시아 정부가 자국 국적을 그에게 주겠다고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애국심으로 한국 국적을 지켰다. 이러다보니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인들 중에서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민 사회의 화합에도 앞장섰다. 그가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는 동명과 성창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곳에 진출해 한국 근로자들이 인도네시아에 많이 정착했다.

이들의 복지를 위해 한인회 구성에 앞장섰던 그는 초대 한인회 수석부회장을 거쳐 1986년에는 2대 회장에 취임했다. 사업이 정착된 90년대부터는 자주 한국을 방문했다. 이 무렵 필자도 부산 해운대에서 그를 만나 인도네시아 활동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그 때도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자원부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기업들이 오일과 산림이 풍부한 인도네시아로 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에서 유명해지자 우리나라 외교통상부는 그를 ‘역사속의 한국인’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MBC는 ‘세계속의 한국인’ 프로그램에서 그의 현지 활동을 취재해 방영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인도네시아 생활을 그린 <젊은이여 세계를 웅비하라>는 자서전을 준비했으나 탈고를 못하고 타계했다. 이 책은 나중에 둘째 아들 기섭씨가 내용을 정리해 출간했다.

이처럼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오가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그가 병상에 눕게 된 것은 200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사업차 서울에 들렸던 그는 서울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이후 일어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별세했다. 가족들은 고인을 천안에 있는 ‘망향공원묘지’에 모셨다. 송복순 여사도 3년 전 별세해 이곳에 묻혔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신씨는 기역, 기섭, 기혁 등 3남을 두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사랑은 자식에게도 이어져 장남 기역은 인도네시아에서 아버지 유업을 이어 받아 무역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 교민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기고와 서강대 졸업 후 국회정책연구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기섭은 현재 두바이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아프리카와 중동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데 장남 문진이 지난해 영국 캠브리지대에 입학했다.

삼남 기혁은 현대자동차에 오랫동안 근무한 후 현재 서울에 머물고 있다. 신씨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하잠리 집에는 현재 그의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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