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10년 전 일본 유학 중 첫 나들이를 하게 된 곳은 동경의 번화가 신쥬꾸(新宿)였다. 지하철역 출구를 나서는 순간 문득 나의 시선은 우뚝 솟은 빌딩과빌딩의 틈 사이로 흐르는 아름다운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동경의 빌딩옥상에 놀랄 정도로 절묘한 형태가 하늘을 향해 떠 받치고있는 환경조형물이었다. 나 자신이 조형물에 넋을 잃고 있다는 것을 한참시간이 지나서야 알게되었다. 평소에는 키 높이 정도에서 시선을 두고 거리를 걷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날 따라 우연히 바라본 동경의 하늘과 빌딩사이로 이어지는 조형물의 아름다운 공간창조는 이제까지 접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예술세계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조금 더 골목으로 들어서자 요리사의 커다란 귀와 뒷모습이 빌딩사이로 나타났다 숨었다하는 것이 마치 조형물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신기함과 함께 도시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밖에도 빌딩의 옥상에서 떨어질 듯 한 불도저와 추상적인 형태의 황금색 조형물이나 아주 오래된 시가지에 불쑥 지켜선 낙타의 먼 시선을 접하였을 때, 그동안 내가 알고있던 복잡하고 여유가 없는 도시 동경의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외부적으로는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공간을 제공하는 여유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유학생활에 찌든 나의 시선을 환경조각에 깊이 심취하게 했던, 동경의 첫나들이는 뜻깊은 날로 기억되고 있다.  울산시에도 어느 정도 큰 건물 앞에는 어김없이 조각품이 놓여있다. 그러나 환경조형물이라고 설치된 작품은 숫적으로 늘고 있을 뿐 내적으로 흥미로운 공간은 못되는 것 같다. 화랑이나 실내에 전시돼야 할 작품들이 거리에 나와있는가 하면, 작품이 놓여있지 않아야 할 장소에 설치돼있어 보행자에게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한다.  즉, 도시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거리의 환경조형물과 갤러리에서 일정기간 전시되는작품은 성격상 역할과 기능이 다르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꼭 건물 앞에 만 설치돼야하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세계의 어느 도시나 환경조형물은 광장, 산책로, 보도, 건물, 벽 등 다양한 장소에 설치돼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설치장소에 따라 작품의 성향이나 소재 및 재료는 얼마든지 바뀔 수 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크기와 작가의 지명도도 고려돼야한다. 꼭 대형작품이거나 유명작가의 작품만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거리에 놓일 환경조형물이라면 어느 정도 조건(품격)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시위주의 여타 예술행사와 달리 거리에 설치되는 조형물은 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 하는 영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환경조형물은 하나의 관광상품으로서, 시민뿐만 아니라 울산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영원한 매체로서 역할이 필요하다  이것이 법적인 문제라면 개선돼야 할 사항이고, 예산상의 문제라면 몇 작품이라도 작품다운 작품이 울산시내에 설치되어 시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 하는 환경조형물로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시환경은 물리적 공간을 확장시키는 것에 만 그칠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공간의 확장이 함께 해야 한다. 보다 유기적인 도시공간, 그 속에 시민과 함께 자유롭게 변동하는 현실의 시간과 예술의 공간이 함께 공존하는 아름다운 울산의 거리를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과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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