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전리 각석

▲ 천전리각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다. 반구대암각화와 함께 울산에 있는 2개의 국보 중 하나로, 선사인들의 염원과 신라왕족의 러브스토리가 공존하며 신라 정치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가 새겨진 바위다.

“반갑습니다. 천전리각석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서두를 떼며 해설을 했던 사람이 오늘은 관람객 입장으로 각석을 둘러보기로 했다. 평소 필자가 앉아서 근무하던 곳에서 옛 동료의 얼굴을 보니 반갑고 친정에 온 듯 기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울산에 있는 국보 둘 중의 하나, 선사시대 사람들의 염원과 신라 왕족의 러브스토리가 공존하는 바위, 신라 정치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가 새겨진 바위, 반구대암각화와 아울러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는 곳. 바로 천전리각석이다.

가로 9.5·세로 2.7m 거대한 바위
상단엔 청동기시대 기하학 문양
하단엔 신라인의 로맨스 새겨져
굽이굽이 흐르는 대곡천 보노라면
호국 다짐하던 화랑들의 모습 선해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중류의 천전리각석을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자동차로 울산시 울주군 언양에서 35번국도(반구대로)를 따라 경주방면으로 가다 보면 천전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을 하면 천전리각석 이정표를 따라 시골길로 접어들고, 1.7㎞쯤 가면 사회복지시설인 동향원 앞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1㎞정도 가면 천전리각석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 반겨주며, 왼쪽으로는 대곡박물관이다.

 

해설사의 집에서 각석까지 100m 남짓한 길은 참 아름답다. 이 길을 1500년 전 사부지 갈문왕(徙夫知 葛文王)이 그의 애인과 손잡고 걸었으리라 생각하니 마치 내가 공주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행복하다. 긴 치마를 잘잘 끌며 갈문왕이 내미는 손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 저 넓적한 돌바닥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며 장래를 굳게 약속했으리라. 그들의 사랑은 세월 속에 흩어진지 오래지만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의 여운으로 온통 자기들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천전리각석은 1970년 동국대학교 불적조사단에 의해 학계에 처음 보고돼 1973년 5월4일 국보 147호로 지정되었다. 국보로 지정된 돌로는 석불, 부도, 탑이나 비 등이 있으나 암각화가 국보인 사례는 이 각석과 반구대암각화 뿐이다. 우연찮게도 서로 이웃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은 우리 울산이 자랑스럽게 모셔야하는 지체 높은 바위이다.

각석의 면은 가로 9.5m, 세로 2.7m이고 앞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어 비와 햇빛으로부터 보호된다. 연화산이 앞쪽에서 바람까지 막아주니 풍화작용이 최소화되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각석이 은밀한 장소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진한 울림을 안겨주고 있음은 오롯이 천혜의 장소를 택한 선사시대 사람들의 지혜 덕택이다.

각석 상단에는 청동기시대, 하단에는 신라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과 글자들로 가득하다. 1000~20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이에 두고 같은 바위 면에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기법으로 다른 내용을 빼곡하게 새겨 놓았으니 어찌 신비로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은 여기에 무엇을 남기려고 했을까.

▲ 천전리각석 맞은편으로 대곡천 주변의 평평한 바위에는 전기 백악기에 중대형 공룡들이 유유자적하게 놀았던 200여개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상단 청동기시대 그림은 수천 년 전의 그 모습으로 자기를 봐달라고 소리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선사인이 땀에 저린 모습으로 소원을 새기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무슨 염원이 그리 컸으며, 우리에게 전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동심원, 마름모, 나선형, 보리모양 등 기하학적 문양이 중복으로 새겨져 있다. 수천 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는데 현대인이 그린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슴이 새끼를 거느리고 다니거나 암수가 마주보며 사랑하는 모습 등의 동물상이나 반인 반수 상과 인물상 등이 있다. 이 그림들은 농경생활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일종의 종교적 상징으로 해석되며, 이곳이 제 의식을 행하던 성스러운 장소로 추측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다녀간 뒤 2500여년 뒤에는 신라 사람들이 행차한다. 신라인들은 선조들이 간절한 소망을 새긴 정성과 열정도 외면한 채 그림 일부를 무참히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문자가 있다고 우쭐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신라인들은 그것이 역사적 기록이 될 줄을 미리 알았을까. 옛 그림의 일부만 훼손한 걸 보면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개념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바위 아랫부분에 기마행렬도를 비롯한 새, 용 등의 동물 문양, 항해하는 배 등이 가는 선과 점만으로 표현돼 있다. 배 그림은 신라인들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기마행렬도는 외국사절단의 행차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림 외에 한자가 많이 보인다. 귀족, 관리, 승려, 화랑 등 신분 높은 사람들이 기념으로 글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법민랑(法民郞), 혜훈(惠訓), 흠순(欽純)처럼 단순히 이름만 남긴 것도 다수 있으며, 화랑의 이름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봐 이 일대가 화랑의 수련장이었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아래쪽에 두 쪽의 책자 모양이 유별난데 거기엔 놀라운 스토리가 새겨져 있다. 300여자의 명문(銘文)이 14년이란 차이를 두고 두 차례에 걸쳐 새겨졌다. 먼저 새겨진 오른쪽 부분을 원명(原銘), 뒤에 새긴 왼쪽 부분을 추명(追銘)이라고 한다.

원명은 을사년(525년) 6월18일 새벽 사부지 갈문왕이 우매(友妹) 어사추여랑과 함께 아름다운 이곳에 놀러와 보니 골짜기 이름이 없어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지었다는 등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우매’란 벗이자 누이라는 뜻이므로 갈문왕과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은 혼인을 약속한 근친관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 신라왕실에는 혈통보존과 왕권강화를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추명은 갈문왕의 부인 지몰시혜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이 계곡을 찾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여섯 살 난 어린 아들과 어머니인 법흥왕비가 동행했는데, 그 아들이 이듬해에 일곱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제24대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가장 크게 확장시키고 국권을 부흥시켰으며,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왕이다. 그의 어머니가 이 성스러운 곳에서 기도해서 성군이 되었을까.

또 추명에는 2년 전에 갈문왕이 사망했고 어사추여랑도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 정황으로 보아 갈문왕은 어사추여랑과의 사랑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것 같다. 갈문왕은 조카인 지몰시혜와 결혼하여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사추여랑이 자꾸 눈에 밟힌다. 갈문왕이야 비록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아들이 훌륭한 왕이 되었으니 저 세상에서도 여한이 없을 터이니까 말이다.

어린 날 소년, 소녀 한 사람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랑이야 세월이 흐르면 눈 속에 사라져간 물방울처럼 흔적 없이 지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갈문왕 커플은 몇 겁이 흘러도 바위면의 책속에서 걸어 나와 서석곡에서 노닐다 지치면 바위 속으로 들어가 쉬곤 한다. 현재 진행형의 사랑이고 그들의 애틋한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원명과 추명에는 탈자나 분명치 않은 글자도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한문과 달라서 학자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앞의 이야기가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명문에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6세기께 신라의 정치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음은 틀림없다.

이제 더 까마득히 시간을 거슬러 약 1억 년 전의 전기백악기로 가보자. 각석 맞은편에 넓게 펼쳐진 평평한 바위 위로 중대형 공룡들이 유유자적하게 놀았던 흔적이 있다. 공룡들도 마치 인간처럼 대곡천변의 아름다움을 즐긴 듯하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200여개의 발자국을 찍어 두고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공룡발자국 흔적이 선명한 바위 위를 걷는다. 화석이 닳을까봐 조심스레 발을 디디며 그들의 숨결을 느껴본다. 그러나 지금처럼 많은 관광객이 마음대로 드나들며 공룡 발자국 화석을 마구 밟고 다닌다면 머지않아 발자국은 지워지고 말 것이다. 늦게나마 울산시가 공룡발자국 화석의 보전관리를 위한 기초학술조사를 착수했다니 다행이다. 1억년 후라도 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시급히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 이선옥 수필가

고개를 들고 대곡천 하류 쪽을 바라본다. 이곳에 올 때마다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대곡천이 2008년 한국하천협회에 의해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뽑힌 것은 당연하다. 대곡천 냇물은 구비를 이루며 돌고 돌아 반구대를 지나 사연댐에 다다른다. 이곳을 기점으로 천변의 기슭을 따라 그 유명한 반구대암각화에 이르는 2.3㎞의 오솔길은 ‘선사문화길’로 불린다.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를 아우르는 ‘대곡천암각화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댐 수위로 인해 물에 잠겼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동안 안타까움도 반복된다. 천전리각석은 발견 후 2년여 만에 국보로 지정된 반면 세계인이 주목하는 반구대암각화는 물속에 잠겨 있었던 탓으로 국보로 지정되는데 20년이 넘는 세월을 허송했음을 거울삼아 보존에 대한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잠정이란 딱지를 떼어내야 한다.

서석곡에 오면 아름다움에 더해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쳐나 경건해진다. 그래서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지난날 여기서 해설을 할 때마다 빼먹지 않았던 코멘트가 있다. “여러분! 이곳은 기도발이 잘 받는 곳입니다. 오신 김에 소원 한 가지씩 빌고 가셔도 좋을 듯합니다. 혹시 이루어질지 누가 압니까?”라고. 오늘도 소원 한 가지를 빌고 탐방을 접는다.

이선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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