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1)해석의 선거 신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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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은 5대 울산총선에서 대리인을 내세워 상대방을 비난하는 새로운 선거공법을 도입해 상대방 후보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사진은 문중 산소로 해석은 영면 후 연암동에 있는 이 산소에 묻혀 울산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해석 정해영은 울산에서 두 번에 걸쳐 당선되었다. 그가 국회부의장까지 지냈던 7선 국회의원인 것을 생각하면 울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 한 시간은 길지 않다. 그런데도 울산사람들에게 그가 울산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기억되는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으로 풀이된다.

첫째 그의 집안이 울산 토박이었기 때문이다. 1915년 9월 울산군 하상면 진장리에서 태어났던 그는 영일 정씨 중시조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18대 손으로 그의 조상 때부터 울산에서 살았다. 그의 문중 산소는 무룡산에 있는데 그 역시 영면 후 이곳에 묻혔다.

부산 출신 양기태 후보 출마시켜
“김택천 후보는 벙어리 의원” 비난
정치에 대한 혜안 깊어
반대파 우석과도 좋은관계 유지
동천학사 지원 등 울산사랑 표현

그는 6대 총선부터는 부산으로 선거구를 옮겨 출마했지만 본적지는 울산에 그대로 두었다. 그는 자신이 지속적으로 야당정치인으로 활동한 것이 고려 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중시조 포은의 반골 기질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는 서울에 동천학사를 지어 서울에 거주하는 울산 대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서울에 동천학사를 세운 계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어릴 때 외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인재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는 가르침을 받은 내가 처음 생각한 것이 ‘동천장학회’라는 장학기금이었다. 동천은 내가 태어났던 진장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개울 이름에서 땄다. 동천장학회가 발족한 것은 휴전직후로 이때 서울 성북동에 400여 평의 대지를 마련, 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시설을 갖추어 울산에서 서울로 진학한 학생들을 선발해 숙식을 제공했다. 이 장학시설은 1977년까지 25년 동안 500여명의 학생들에게 기숙사와 장학금을 제공했으며 이곳을 거쳐 간 학생들 중에는 국가 인재들이 많다.”

심완구, 차수명 등 동천학사 출신의 울산 인물들은 이런 해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2년 11월 해석의 본가에서 가까운 남외동 정지말공원에 ‘해석 정해영 송덕비’를 세웠다.

해석은 울산선거 역사상 선거공학을 처음으로 시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해석이 울산에서 출마할 때까지만 해도 후보들은 선거에서 친인척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과 물량공세로 표를 모았다. 그러나 해석은 5대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공략하는 수단으로 요즘말로 하면 ‘저격수’를 기용했다.

해석은 이승만 정권시절 자유당 중진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어 이것이 선거 이슈가 될 경우 불리한 여건에 있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었지만 당선 후 곧 자유당에 입당했다. 그는 이에 대해 주위 사람들의 요청과 특히 당시 석탄공사 구용서 총재의 간곡한 권유를 거절할 수 없어 자유당 입당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그가 우리나라 굴지의 석탄광산을 갖고 연탄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구 총재의 권유를 쉽게 거절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재정이 탄탄했던 그는 입당 후 초선의원이었지만 자유당 내에서 중진 대접을 받았고 이러다 보니 당내 요직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 이 때 그와 경쟁을 벌였던 인물이 이용범 의원이었다. 건설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던 이 의원 역시 당내 실력자였는데 둘이 처음 경쟁을 벌인 자리가 경남도당 위원장 자리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당시 자유당 내 최고 권력자인 이기붕이 이 의원을 지원하는 바람에 해석이 졌다.

해석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유당 사령탑은 원맥사건을 계기로 은연중 나를 자유당에서 제거 축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단한 세도를 부렸던 이용범 의원을 내세워 나에게 시비를 걸게 하고 여차하면 나를 때려잡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때 자유당 경남도당위원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토건업을 하고 있던 이 의원은 주기적으로 자유당 간부들에게 정치자금을 상납함으로써 이기붕과 그의 부인 박마리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이 때 해석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이 의원을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천하의 무식꾼’이라고 써 놓고 있다. 이 싸움으로 결국 해석은 자유당을 떠나게 된다.

5대총선은 4·19학생 의거로 자유당이 무너지고 바로 치러진 선거였기 때문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유당에 몸을 담았던 그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선거에서 그의 경쟁자였던 민주당의 김택천 후보는 2대 국회의원을 지냈을 뿐 아니라 아버지 추전 김홍조의 후광을 그때까지 받고 있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해석이 김택천 후보 저격수로 내 세운 인물이 양기태씨였다. 출마 당시 27세로 주소가 부산 범일동이었던 양씨는 울산과 연고가 전혀 없었다. 경력 역시 마산상고 출신으로 진주지구 노동조합위원장을 지낸 것이 전부였다.

그는 울산에 선거사무실을 내었지만 이 때 선거사무실은 해석이 얻어주었고 그를 추종하는 운동원들 역시 해석 운동원들이었다. 선거운동 역시 자신의 당선보다는 김택천 후보를 비난하는 것이 전부였다.

김택천 후보가 ‘벙어리 국회의원’이라는 닉네임을 얻게 된 것이 이 때부터다. 부자집에서 태어나 호사스럽게 자랐던 김 후보가 2대 총선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아버지 추전의 후광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부 정책을 비난해야 하는 야당의원 자리가 어울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2대 국회동안 제대로 된 국정 질의를 한 적이 없다. 이러다보니 동료 의원들 사이에 ‘벙어리 국회의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양씨는 이런 김 후보의 약점을 유세 때마다 비난했고 이런 해석의 선거공학이 맞아 떨어져 김 후보는 무려 6000여표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자기 선거를 포기하고 김 후보의 약점을 들추어내는데 올인했던 양기태 후보는 겨우 600여 표를 얻어 8명이 출마한 울산 을구 선거에서 꼴찌를 했다.

선거가 끝난 뒤 김택천 후보를 지지했던 최형우와, 또 한국사회당 출신으로 정의감에 불탔던 김병룡 후보가 해석을 찾아가 ‘정상배’라고 부르면서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를 한 배경에는 이런 선거전략이 숨어 있다.

우리가 해석의 의정활동을 얘기할 때 궁금한 것이 그가 우석 이후락 선생과 어떻게 지냈나 하는 것이다. 해석은 2대와 5대 총선에서 울산에서 당선된 후 부산으로 가 6대부터 10대까지 연속 5선을 더해 7선 국회의원의 관록을 쌓았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윤보선 대통령 후보 선거사무장,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 신민당 원내 총무, 신민당 부총재 등 야당 중진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공화당 정권과 맞설 때가 잦았다. 이 때 우석 선생은 박 정권의 2인자로 활약했기 때문에 둘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석 회고록에는 우석 선생에 대한 얘기가 별로 없다. 단지 그가 1963년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경쟁자였던 윤보선 대통령 후보 선거사무장을 맡았을 때 우석이 찾아와 선거사무장직을 맡지 말 것을 종용한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내가 윤보선 대통령 후보 선거 사무장직을 수락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자 박정희 후보의 최측근이었던 이후락씨가 두 번이나 나를 찾아와 사무장직을 맡지 말 것을 간곡히 종용했다. 그는 고향 선배인 내가 승산 없는 선거를 맡아 재력을 소모하는 것 보다 권력에 접근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 이런 권유를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무렵 윤보선이 선거사무장직을 맡아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내가 권력에 빌붙지 않은 야당인으로 윤보선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자는 생각으로 이 제안을 거절했다.”

해석의 측근으로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았던 최종두 시인은 “해석은 정치에 대한 혜안이 깊었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야당 국회의원이지만 우석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활동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고향의 선후배로 우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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