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언양과 오영수문학관
자유기고가

▲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언양성당 근처의 오영수문학관 전경. 주차장에 들어서자 문학관 건물이 방문객을 반갑게 내려다보고 있다. 박철종기자 bigbell@ksilbo.co.kr

“올해 국어영역에서는 어떤 시가 출제될까요? 누구의 소설이 나올까요? 콕! 한 번 찍어 봐 주세요 선생님.”

매년 이맘때쯤이면 불안한 얼굴의 고3 수험생들로부터 어김없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 연례행사마냥 받아온 질문이 또 시작되는 걸로 봐서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올해도 지난해나 크게 다를 리 없다. 몇 백편 아니 몇 백만 편이 될지도 모르는 문학작품 가운데 수능출제 작품을 맞춘다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요즘 젊은 세대가 즐겨 쓰는 신조어로 표현하자면 ‘대략난감’이다.

항상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의 언양
언양읍성·지석묘 등 문화유산 다양
갯마을·요람기 작가 오영수의 고향
송대리엔 울산 최초의 문학관 건립
빛바랜 원고지 속 토속적 정취 가득

“나는 선생이지 점쟁이가 아니다 요놈들아!” 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고 만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무엇인가 크고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냄과 동시에 내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주는 작품 하나가 떠올랐다. 아, 그래 ‘화산댁이’…그것은 바로 작가 오영수(吳永壽, 1909~1979)의 소설 <화산댁이>였다.

1952년 1월 <문예>(文藝)에 발표된 오영수 선생의 단편소설이다. 두메시골에 사는 화산댁이 연락이 오가지 않는 막내아들 집을 찾아왔다가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도회지 사람의 악속성(惡俗性)이 몸에 밴 아들부부에 비해 비록 무지해서 실수를 거듭하지만 시골사람의 순박함과 함께 따스한 모정을 지닌 화산댁이라는 인물을 통해 근대화과정에서 상실돼 가는 전통적 가족의 가치 복원과 점차 사라져가는 인간애 회복에 대한 소망을 담은 소설. 나는 이 소설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오영수 선생을 뵈러 언양으로 발길을 내달았다.

▲ 문학관 앞뜰에 있는 오영수 선생의 동상

언양(彦陽). 지명은 곧 그 땅의 역사(歷史)요 혼(魂)이라는 말이 있다. ‘이곳이 항상 양지 바른 곳이다’라는 지명 유래를 가진 언양은 그래서인지 울산에서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소요사건상황’에 따르면 4월2일 언양 읍내에서 약 700명의 군중이 투석, 기타 광포 행위를 감행했으므로 발포하여 진정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울산에 있어 소요의 시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옛날 울산과 언양 백성들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서로 혼담도 오가지 않을 정도였다니 그 사이를 짐작해볼만하다. 하지만 격세지감이랄까. 오늘날 울산과 언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발전했다. 고속철도 KTX역이 생겨나면서 언양은 울산의 관문 역할과 더불어 다양한 문화유산과 함께 예술과 문학이 상존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 그가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펴낸 <현대문학>

언양 중심부를 통과하면서 부쩍 달라진 거리풍경에 잠시 차량속도를 줄였다. 양 길가에 돌을 놓아 현대적인 물길을 만들고 그 돌길 위로 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언양 중심시가지 거리조성사업 일환으로 조성된 듯 보였다. 또한 사적 제153호인 울주 언양읍성이 복원 정비되고 읍성 남문인 영화루가 새롭게 복원되면서 언양은 명품 문화거리와 함께 울산 문화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변신을 꿈꾸고 있는 듯 했다. 또 이 부근에는 언양성당과 언양지석묘가 있다. 1932년 8월15일 고딕양식의 석조 건축물로 세워진 언양성당은 2004년 9월4일 등록문화재 제103호 근대문화유산에, 언양지석묘(彦陽支石墓)는 1997년 10월9일 울산시 기념물 제2호로 각각 지정됐다.

언양지석묘를 지나자 오른쪽으로 입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오영수문학관’이라고 적혀있다.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꺾자 차는 곧 언덕을 올라 가지런히 정돈된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키 큰 나무들이 시원스레 하늘을 향하고 있고, 나무 사이로는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 청아하게 들린다. 주차를 하고 올려다보니 이제나 저제나 자식 올까 기다리는 나이든 어버이 같은 모습을 한 문학관 건물이 방문객을 긴 시선으로 반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 오영수문학관과 가까운 언양읍성

오영수 선생은 1909년 2월11일 언양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월주(月洲), 호가 난계(蘭溪)다.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선생의 추천으로 1949년 ‘남이와 엿장수’를 <신천지>에 발표하고 그 이듬해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머루’가 입선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두 편의 중편소설을 비롯하여 150여 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을 남겼다. 포털사이트를 비롯한 각종 자료에는 오영수 선생이 1914년에 출생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5년이 앞선다고 오영수문학관 측은 밝혔다. 그를 추천해 준 동리보다 한 살이 많은데 부담을 느껴 스승 예우차원에서 한 살이 적은 1914년으로 문학적 출생년도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1979년 71세의 일기로 고향인 이곳 언양 송대리 화장산(花藏山)에 묻혔고, 묘역 앞에는 ‘작가 오영수 여기 잠들다’라는 묘비가 선생의 사후를 지키고 서있다. 그리고 2014년 1월21일 울산 최초로 연면적 538㎡에 지상 2층 규모의 문학관이 들어섰다. 그 이름 하여 ‘오영수문학관’이다.

▲ 언양지석묘

문학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난계를 곧바로 뵐 수 있었다. 동상으로도, 흉상으로도, 밀랍인형으로도 남아 있었다. 문학관에 전시된 책 속에도 머무르고 있었고 빛바랜 원고지 속에 여전히 자리하고 계셨다. 건물 간판과 입구 입간판 서체도 선생의 원고에서 글자를 발췌해 제작했다는 설명을 듣노라니, 선생은 이곳에서 이승의 문학관으로 화신해 있음을 나는 보았다.

문학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오영수 선생은 광복 이후 역사 격변기에 많은 작품을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이와 엿장수>에서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했고, <화산댁이>에서는 가족의 가치를 상실해버린 아들을 위해 떡을 만들어간 어머니 화산댁이를 통해 인간적 순박함과 인정을 깨우쳤다. <갯마을>에서는 주인공 해순의 인생을 통해 삶의 애환과 서민적 정취를 유감없이 드러냈는가 하면 “너희들은 그렇게 ‘범버꾸범버꾸’ 하고 먹어라. 나는 ‘얌냠’ 하고 먹을게”라는 <요람기>의 해학성을 통해서는 한국적 서정과 토속적 정취를 가감 없이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비판과 참여에 목적을 둔 작품이 아니라, 짙은 한국적 서정과 소박함을 글로 표현하는 순수문학을 통해 오히려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를 거꾸로 관통하여 인정이 살아있고 인간의 순수함이 회복되는 세상을 지향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지향했던 작가의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문학관을 둘러보고 난 뒤 난계문학에 대한 소회가 마무리 될 즈음에 선생께서 1930년 1월25일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뎐신대’라는 시(詩) 한 편에 마지막으로 눈길이 머물렀다.

뎐신대

눈 내리는
저녁에
석유 사들고
바삭바삭
흰 눈을
밟고 오니가
논뚝에 옷버슨
전신대 하나
눈바람에 치워서
왕왕 울어요.

‘눈바람에 치워서 왕왕 울어요.’ 눈 내리는 추운 날 저녁, 석유를 사들고 바삭바삭 흰 눈을 밟고 오다가 논둑에 서있는 전신주를 바라보는 배경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차가운 전신주에다 화자의 감정을 이입해놓은 대목을 읽으며 선생이 살았던 시대와 가난한 현실이 시간의 경계를 넘어 오롯이 내게로 전해져 왔다.

▲ 홍중표 (전)울산문화관광해설사협의회 회장

한때 ‘시가 밥 먹여주느냐’는 말이 있었다. ‘문학이 밥 벌어주느냐’는 말도 있었다. 그렇다. 그 말들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가 밥을 먹여주지 않고 소설과 문학으로 밥벌이가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접하게 되는 간접경험이 어떤 때는 우리의 삶을 바꾸기도 하고, 시를 읽다가 문득 가슴에 와 닿는 한 구절의 함축적 시구로 인생이 변화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어야겠다.

이번 가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봇대 하나가 눈바람에 추워 왕왕 울기 전에 수능 끝낸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 ‘오영수문학관’으로 와야겠다.

홍중표 (전)울산문화관광해설사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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