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백두대간 제26구간(부항령~대덕산~삼도봉~삼봉산~빼재)
거리 20.1㎞, 시간 8시간40분 - 산행일자 : 2016년 6월12일

▲ 삼봉산 정상에 이를 무렵 운무가 몰려다니며 시시각각 변모하는 풍광이 연출됐다. 정상은 바위로 이어진 산등성이 구간보다 잡목이 주변을 가렸고 협소하다.

제26구간의 아침식사 자리는 부항령(釜項嶺) 공원이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선 대원들을 위해 준비한 간편식을 보통은 버스로 이동하다 휴게소에서 먹고 간다. 식후 곧바로 산행을 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날 식사자리는 산행 들머리가 되었다. 제25구간에서 일정이 맞지 않아 합류하지 못한 대원과 단독 야간산행을 염려해서 동행한 산행대장 등 2명이 부항령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육십령에서 부항령까지 밤샘 산행을 마치고 이날 다시 동행하게 된다. 버스가 삼도봉 터널 앞 공원에 도착하니 야간산행을 마친 2명이 매트를 깔고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밤의 사연 다 알 수는 없지만 보이는 그림만으로도 더 돈독해진 악우의 정만은 그려지고도 남음이 있었다.

덕산재서 대덕산 오름은 쉴곳 없는 육산
바람 없고 습도 높아 인내해야 들수있어
해발 1290m의 대덕산은 넉넉한 품 가져
산정 풍광만으로 산의 기운 충분히 느껴

정자와 널찍한 잔디밭이 있는 공원에서 느긋하게 간편식을 먹은 후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없는 옛길을 따라 부항령을 올라선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길섶의 싱그러운 풀잎은 이슬을 잔뜩 머금었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였고 바람이 없으니 이슬 머금은 풀잎은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선두 대장은 등로에 쳐 놓은 거미줄과 풀잎 끝 이슬을 온몸으로 거두며 길을 열어준다. 풀잎은 선두 길라잡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착착 감기면서 차가운 물기를 털어낸다. 불과 수백m를 걷지 못하고 길라잡이의 등산화는 질퍽거리기 시작한다. 이즈음이 산길을 열어야 하는 선두 산행대장의 애환이다.

▲ 대덕산은 산정 풍광만으로도 산의 기운을 느껴볼 수 있다.

부항령에서 덕산재까지 이어지는 약 6㎞의 초반부는 해발 700~800m 사이를 오르내리는, 산등성이는 완만하고 걷기에 좋은 곳이다. 숲은 이제 진초록.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의 기운은 왕성하고 어디 한 곳 청청하지 않은 곳이 없다. 싸리 꽃이 이슬을 머금어 보석처럼 빛나는 사이로 대원들의 질주가 고요한 숲을 깨운다. 부드러운 육산의 완만한 등성이를 걸으며 대원들은 계절이 주는 청량함을 맘껏 흡입한다.

동쪽의 경북 김천 대덕면과 서쪽의 전북 무주 무풍면을 연결하는 30번 국도가 대간을 가르는 덕산재. 지방도가 아닌 번듯한 국도가 통과하는 잿마루의 휴게소가 오고가는 길손이 뜸해서인지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준다는 굿당으로 바뀌었다. 휴게소에서 한 잔의 차나 술로 시름을 달래는 것이나, 굿당에서 푸닥거리 굿으로 풀어내는 것이나 마음을 풀어주는 건 매 한 가지란 얘기인가. 전 국토를 거미줄처럼 엮어놓은 도로망이 좋아지면서 지역 간 이동이 분주하고 활발해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생활권과 경제활동 권역이 도로 사정에 따라 바뀌면서 소원해지는 지역이 생겨나는 것이다. 쉬는 동안 자동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덕산재의 풍광은 후자 쪽인지 한가롭기 그지없다.

 

덕산재에서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케이크에 수박화채가 등장했다. 대원 1명의 생일이라고 동료대원이 산길 수㎞를 지고 와서는 축하해주는 것이다. 밤새워 미답구간 산행을 하는 대원과 동행키 위해 따라나서는 산꾼의 마음이나, 그렇잖아도 무거운 종주 산꾼의 배낭 속에 수박과 케이크를 매고 와 생일을 축하해주는 산꾼의 마음을 쉽게 뭐라고 표현키는 어렵다. 어쩌면 저 산길을 함께 걸은 사람만이 알 일이다. 덕산재가 잠시 시끌벅적했다.

덕산재에서 대덕산 오름은 한 호흡 쉬어가기조차 마땅찮다. 시야를 틔워 주고 머리칼을 쓸어 올릴 만한 바람 자리 한 곳 없는 육산이다. 그렇게 거칠지는 않지만 이동거리 약 3㎞에 급한 경사를 650m 정도 꾸준히 올라야 한다. 바람은 없고 습도가 높아 온몸이 젖도록 땀을 헌상한 뒤에야 산정에 들 수 있는 산, 해발 1290m 대덕산의 품은 넓다. 산의 품이 넓으니 그 품에 등을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정상 표석 뒤에는 ‘대덕산에서 기를 받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없다’고 쓰여 있다. 안개에 가려 산의 품을 다 둘러볼 수는 없지만 어디 한 곳 막힘없이 열어주는 산정의 풍광만으로도 대덕산의 기운을 느끼고 또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대덕산에서 약 1.4㎞지점에 있는 또 다른 삼도봉. 일명 초점산으로 가는 길은 언제 어느 때 걸어도 유유할 수 있는 초원 오솔길이 열린다. 산등성이는 유려하고 키가 낮은 싸리나무와 억새가 어우러져 막힘이 없는 곳.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주능선과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수도지맥 능선을 휘휘 둘러보면서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오늘처럼 구름이 발 아래로 깔릴 때면 말 그대로 구름을 밟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일 정도로 시야가 트이고 길은 편안하다.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면 쉴(休) 수가 있고 사람(人)이 산(山)에 기대면 신선(仙)이 된다’고 했다. 오늘 같은 날은 한없이 나무에 기대고 한없이 산에 기댄 것 같은 마음으로 길을 열어간다.

대덕산 삼도봉(초점산)은 이제 태백산에서부터 대간 능선이 경계를 이루던 경상북도와는 방점을 찍는다. 진행방향 왼쪽에 경상남도와 오른쪽에 전라북도를 나란히 하면서 백두대간이 흐르게 된다. 경상북도 김천 대덕면, 전라북도 무주 무풍면, 경상남도 거창 고제면의 경계지점인 삼도봉(초점산 1249m)에서 뒤이어 열어갈 삼봉산을 바라보며 중식을 먹는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사방으로 안개가 짙어지고 비가 후두둑거린다. 서둘러 초점산을 떠나 급격히 세를 낮추는 소사고개를 향해 내려선다.

 

소사고개는 해발 680m 정도에 위치하면서 대덕산과 삼봉산 사이에 넓은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해발고도에 비해 전체 지형이 완만해서 농장들이 대간을 따라 즐비하게 조성되어 있다. 거창과 무주를 이어주는 1089번 지방도가 소사고개를 넘어가면서 고갯마루는 산간 오지마을 같지 않고 산에 기대어 사는 주민들은 생활도 윤택해 보였다.

소사고개에서 삼봉산 오름도 덕산재에서 대덕산 오름처럼 거의 유사한 형태의 경사와 높이를 보이며 조금은 버겁게 산꾼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러나 협로 요충지였던 덕산재와는 다르게 삼봉산 오름은 소사고개의 넓은 구릉지대와 목가적 풍광을 돌아보면서 호흡 조절을 할 수가 있었다. 급경사 오름에서 힘겨워하다가도 소사고개의 풍광을 마주하며 쉬어갈 수가 있었고, 지나온 대덕산과 삼도봉의 헌걸찬 모습까지 돌아보면서 오르니 대덕산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산정에 들 수 있었다. 삼봉산 정상에 다다를 즈음 이어지는 바위로 된 산등성이 구간에서, 산이 열어놓은 풍광은 시시각각 몰려다니면서 변모하는 운무와 함께 긴 오름에 힘겨워 하던 산꾼의 노고를 풀어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너울너울 춤을 추다가는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 운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신기루처럼 아무것도 잡을 수 없지만 그냥 두고 바라보면 실체가 뚜렷한 구름…. 이 하루, 여러 번 산에 기대어 선 느낌이었다.

표석이 세워져 있는 삼봉산(해발 1255m) 정상은 오히려 정상에 들기 전 바위 산등성이 구간보다 잡목이 주변을 가렸고 협소하다. 정상의 표석도 지역홍보 차원에서 세우다보니 산과 어우러진 모양도 아니고, 크면 좋은 것인지 협소한 정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크다는 인상을 준다. 전 대원이 다 설 수도 없는 삼봉산에서는 서둘러 산정을 벗어났다.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삼봉산에서 빼재(秀嶺)까지는 약 4.1㎞의 산길이 이어지지만 대체로 완만하면서 내림길이다. 초하의 숲길이 보여주는 넉넉함과 싱그러운 풀꽃의 향을 맡으며 호젓이 걷다보니 무상해지리 만큼 편안한 길이 계속 된다. 마음의 잡다한 생각들도 언제 놓아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옥빛 오솔길에 푹 빠져서 걷게 되는 길의 연속이다. 아름답고 빼어난 풍광 앞에서만 넋을 놓아버리는 게 아니라 그저 싱그럽기만 한 숲 속 오솔길을 걸으면서도 시름을 더는 것이다.

종주산행(縱走山行)이란 ‘능선을 따라 산을 걸어,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일…’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 목표점에 도달하기 까지는 걸어온 거리만큼 나름의 숱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이 하루도 지나온 발자국 하나하나에 대원들의 땀과 인내와 우정 어린 사연을 남기며 날머리 빼재에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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