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방어진 산성 - 울산 해안방어의 거점형 신라성

▲ 1872년 울산목장지도에 표기된 방어진 산성.

울산시 동구 전하동 산148 일대에는 읍지(邑誌) 및 지지서(地誌書) 등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곽 유적이 하나 있다. 포산(浦山, 해발 173m)의 동쪽 지맥(支脈) 끝자락인 해발 100m의 얕은 구릉 정상에 위치하는 토성(土城)이 바로 그것이다. 구전에 따르면 이를 ‘신라성(新羅城)’이라 했는데, 현재는 명칭이 바뀌어 ‘시리성’으로 불리고 있으며, 학계는 방어진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 ‘방어진 산성’이라고 한다.

한편, 이와 관련해 조선후기 남목마성의 감목관으로 부임한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가 지은 시(詩) 중의 하나인 ‘신라고성(新羅古城)’이 주목된다.

옛 목장에 봄이오니 푸른 풀들이 돋아나고(碧草春生古牧場) 무너진 성의 저녁볕은 신라왕의 안부를 묻네(壞城殘日弔羅王) 평원의 끝 구름 낀 모래밭을 응시하니(平原極目雲沙際) 해거름의 아득한 말떼들이 바람결에 흐느끼네(萬馬嘶風立杳茫)

내물왕 38년 5월에 왜병들 서라벌까지 쳐들어와
‘동해 뚫리면 서라벌이 곤욕치른다’는 교훈 얻어
울산~포항 해안가 곳곳에 신라성 흔적 남아있어
동구 전하동 포산에 토성, 현재 시리성으로 불려

이 시(詩)의 내용은 오래된 신라성이 말을 기르던 마성(馬城, 목장성) 안에 위치해 있고, 더 넓은 구릉 말단부의 선상지(扇狀地)와 바닷가 모래밭 일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앞서 잠시 언급한 해발 100m 높이의 ‘시리성(신라성)’에서 본 경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현재는 주변에 높이 솟은 아파트에 가려 바다를 시원하게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서라벌과 동해변 신라성의 관계.

비록 무너져 있다고 하더라도 ‘시리성’의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이 산성의 성격과 그 위치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며, 그러한 점에서 이 산성을 표기하고 있는 옛 지도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1872년에 작성된 <울산목장지도>에는 목장을 둘러싼 성곽인 마성(馬城)과는 별도로 ‘구산성(舊山城)’이라는 이름을 달아서 표기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현재의 방어진 산성(시리성)과 비교해 보더라도 그 위치가 같고, 홍세태가 주변 경관을 언급한 것과도 구도가 아주 비슷하다. 그리고 홍세태의 시(詩)에 언급된 ‘신라고성(新羅古城, 신라 옛 성)’과 지도에 표기된 ‘구산성(舊山城, 옛 산성)’의 뜻풀이도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이 모두는 같은 성(城)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둘을 종합해 보면, 방어진 산성은 ‘신라(新羅) 때 쌓은 산성(山城)’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1918년에 제작된 지도에도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한편, 이 성(城)의 평면은 타원형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고, 미포만~일산진에 이어지는 해안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해안을 관측하는 보루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산성 인근의 곳곳에 삼국~일신라시대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어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즉 이와 같은 기록과 현황은 방어진 산성을 신라성이라 비정해도 무리가 없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신라(新羅)는 왜 일산진(日山津)과 전하동(田下洞) 등 울산의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성을 쌓았던 것일까?

▲ 1918년 지형도에서 방어진 산성.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의 입장에서 울산, 기장, 부산, 경주, 포항, 영덕 일원으로 왜인(倭人, 왜병(倭兵) 포함)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들 왜인들은 때때로 상업의 목적으로 방문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침략자로 돌변하여 서라벌 외곽의 동남해안을 노략질 했고, 심지어 왕성(王城)까지 들어와 대치하기도 하고, 성(城)을 부수고 신라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삼국사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부터 신라를 침략한 사례도 살펴 볼 수 있으며, AD 73년인 탈해왕 17년에 왜인들이 목출도(木出島)에 쳐들어와 신라의 각간(角干) 우오(羽烏)가 전사한 기록도 있다.

그리고 AD 500년이 되기 이전, 왜인들의 주 침입로는 서라벌의 ‘동쪽 변경(東邊)’ 지역이었는데, 신라의 대왜(對倭) 관계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경북 영덕에서부터 울산에 이르는 곳을 동변(東邊)지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 왜인들의 침입이 얼마나 흉흉했으면, <삼국사기> 1권 지마왕(祗摩王) 11년(112년) 4월의 기록에 ‘서울(서라벌) 사람들의 떠도는 말에, “왜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쳐들어 온다”고 하여 산골짜기로 다투어 숨어들었다’는 기록까지 찾아 볼 수 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유례왕(儒禮王) 6년(287년) 5월에 왜병(倭兵)에 대비하여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내물왕(奈勿王) 38년(393년) 5월에는 왜인들이 더욱 대담하게 서라벌까지 쳐들어와 5일 동안 금성(金城)을 포위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비록 당시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승리했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동해(東海)가 뚫리면, 곧장 서라벌이 곤욕을 치른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 때문에 신라는 동해 방어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성덕왕 21년(722년) 모벌군(毛伐郡, 현재 외동읍 모화 일대)에 관문성을 쌓아 그들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해에서 서라벌로 들어오는 가장 큰 길을 막는다는 역할에 치중한 것이기 때문에 동해로 뻗은 곳곳의 작은 골짜기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인지 울산에서부터 포항에 이르는 해안가 곳곳에는 신라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모포리 일대에 위치한 뇌성산성(磊城山城)이다. 모포리의 서쪽에 위치한 석성산 정상 일원을 둘러싼 퇴뫼식 산성으로 내부에서 신라시대 토기편들과 유물들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이로부터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약16km(직선거리) 내려온 경주시 감포읍 전촌리 621 일원에 전촌리 토성(土城)이 위치하는데, 상당 부분이 무너져 윤곽이 희미하지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성된 이중의 복곽식(複郭式) 성이다. 성벽을 따라 다량의 신라 도질토기편과 기와편이 흩어져 있으며, 삼국시대 신라의 유물편이 다수를 차지한다.

전촌리 토성으로부터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다시 12km(직선거리) 정도 내려온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1225 일원에는 경주 하서지 목책이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목책을 토성으로 돋우어 보강한 목책도니성(木柵塗泥城)이며, 그 흔적이 미미하여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관련 학자들은 지표조사 시 수습된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 신라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시 남쪽으로 약 18km(직선거리) 이격된 곳에 위치한 것이 바로 ‘방어진 산성’이다. 특히 방어진 산성은 미포만과 일산진으로부터 울산만의 안쪽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그 요충지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점에서 신라성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방어진 산성으로부터 해안을 따라 약 13km(직선거리) 내려간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산 195 일원에는 1988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한 화산리 토성이 위치하고 있다. 흙을 판축하여 쌓은 성(城)으로 산정(山頂)과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이며, 수습된 유물을 통해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외에도 울주군 서생면 화산리 산 175 일원과 경북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 산21 일원의 해안 인접지에도 신라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성터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신라성들을 주목해 보면, 등 간격은 아니지만 서라벌의 동변(東邊)에 해당하는 동해 쪽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주변에 서라벌로 향하는 크고 작은 골짜기가 위치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즉 신라는 동해안의 방어를 위해 거점형 성곽을 해안 곳곳에 일정간격으로 배치하였고, 그 중 하나가 방어진 산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방어진 산성은 비록 현재까지 발굴조사 등 매장문화재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보다 구체적인 성격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서라벌이라는 신라 수도와 동해 변방과의 관계 및 당시 대(對) 왜(倭)의 구도를 대입해 보면, 조금이나마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라 때의 거점형 해안 관망 및 방어의 성격의 신라성은 조선시대 해안 연변봉수와도 유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찰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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