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경주 모화 원원사지(遠願寺址) 가는 길

▲ 소설 속의 모화가 살았던 모화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모화북1길 끄트머리에 있는 원원사지는 <삼국유사>에 자주 등장하는 원원사가 있던 자리다. 사진은 원원사지 바로 앞에 새로 지어진 원원사.

울산 시계(市界)와 접한 경주 모화(毛火)는 정겨움이 묻어난다. 경북 경주시 외동읍에 위치한 모화는 김동리의 단편 <무녀도>를 연상시킨다.

‘경주읍에서 성 밖으로 십여 리 나가서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 불리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 한구석에 모화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버섯이 퍼렇게 뻗어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린 채 옛 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소설 속 모화가 살았던 모화는 꼭 무당이 살고 있을 것 같았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으로 기억된다.

모화에는 외동불고기단지도 있고 원원사지(遠願寺址)도 있지만 한번도 찾아간 적은 없었다.
그리고 모화역은 2007년 6월부터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지만 꼭 들르고 싶은 간이역이었다.

기다림이 있다는건
사랑이 있다는 것
사랑 없이 하루도 힘든데
오늘 철길 따라 걷는다

떠난 기차는 정시에 돌아오지 않는가
그냥 스치어도 좋다
나, 사랑 할 때 슬픔은 기억하나
외로움은 낯선데
오늘
모든 것 그리웁다

내릴 사람 없고
반길 사람 없어도
기차를 보련다
너무 그리워
기차라도 만나련다 -구광렬 시 ‘모화역에서’-

모화역에는 동해남부선의 애환이 서려있다. 모화역 폐역사 조금 못미쳐 오른쪽으로 모화천이 나 있다.

계동교를 건너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다시 하천을 건너야 한다. 어린 시절 경주까지 비둘기호를 타고 가면서 스쳐갔던 모화마을이 보인다.

▲ 모화지(毛火池)를 지나면 삼태봉(三台峰·630m) 등산로의 들머리 겸 날머리인 원원사다.

지금이야 철길과 7번국도 양옆으로 농공단지와 중소기업단지, 일반산업단지에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도 흙먼지만 날렸던 휘휘한 촌락이었다.

천년 고도(古都) 경주에서 토속적이고 무속적 분위기가 <무녀도>처럼 짙게 감돌던 느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신라시대 사찰로
창건이후 역사와 폐사 시기 등은 안알려져
옛 절터 바로 앞에 새로 지어진 원원사
종루 오른쪽 돌계단 오르면 원원사터 나와
현재는 부도 4기와 삼층석탑 2기만 남아

모화가 이 어디쯤 살았구나 상상을 하면서 봉서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모화성당이 보인다.

농촌마을치고는 넓은 도로 옆으로 가을이 익는다. 동네 당수나무도 저 멀리 보이고, 강가에는 갈대가 더 누렇게 물든다. 마을 집집마다 울타리는 물론 논둑까지 돌로 쌓아 만든 것이 유난스럽게 보인다.

드문드문 차량이 오가는 도로 끝지점에 불고기단지가 있다.

모화북1길을 따라 여유를 부리며 모화지에 도착했다. 모화지는 농업용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담수량 150만t 규모로 지은 저수지다.

경주 삼태봉(三台峰·630m) 등산로의 들머리 겸 날머리인 모화지는 봉서산과 산을 넘는 구름을 병풍 삼아 시선을 빼앗는다. 삼태봉 산행길에서 내려다본 모화지가 아득하더니 바로 눈앞이다. 모화마을 어귀에서 아스팔트 길과 시멘트 길, 흙길이 이어지더니 그 끄트머리에 원원사터 입구다.

▲ 원원사지에는 동·서 삼층석과 부도 4기만 남아 있다. 허물어진 돌계단은 옛 모습 그대로다.

원원사는 <삼국유사>에 자주 등장하는 신라 사찰로, 깊은 산속에 꼭꼭 숨은 옛 절터는 사적 제46호로 지정돼 있다. 원원사지 바로 아래에 새로 지은 현재의 절 이름은 ‘遠願寺’(원원사)지만 <삼국유사>에는 ‘遠源寺’(원원사)로 되어 있고 <동경잡기>의 한자표기는 ‘遠願寺’다.

원원사를 감싸고 있는 산은 봉서산이다. 경주에서 울산에 걸쳐있는관문산이 있고 관문산의 북쪽 산을 별도로 나누어 남봉을 사성산 또는 사영산이라고 하고 북봉을 봉서산이라고 부른다.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인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세운 금광사(金光寺)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에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의 중심 도량이었다. 명랑은 신라 신인종의 중흥조로, 사간 재량(才良)의 아들이며 왕족 출신으로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외조카다.

원원사는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하며 지은 호국 사찰이지만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시기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옛적에 불국사 주지가 산하 절집을 순방할 때 울산의 신흥사와 옥천암에 앞서 꼭 들렀다고 전해진다.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이거사지, 불국사, 감산사지, 숭복사지 등 신라시대의 주요 사찰들이 이 길을 따라 세워졌다. 토함산을 따라 경주에서 울산에 이르는 길은 신라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고대 교통로의 하나이기도 했다.

 

옛 절터 바로 앞에 새로 지어진 원원사의 천불보전을 오르는 계단 옆 돌비에 ‘방하착’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방하착(放下着)은 무소유를 의미하는 불교 용어다.

방하착은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뜻이다. 흔히 ‘내려놓아라’ ‘놓아 버려라’라는 의미로 불교 선종에서 화두로 삼는 용어이다. 조주와 엄양의 선문답을 되새기게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엄양존자가 먼길을 걸어 조주선사를 찾아왔다. 조주가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엄양이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 말에 조주는 “방하착(放下着)”을 외쳤다. ‘내려놓아라’는 뜻이다. 엄양은 그 말을 좇아 손에 든 염주와 지팡이를 내려놓고 조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조주의 대답은 똑같았다. “방하착!” 엄양은 잊은 게 있는 듯 등에 진 걸망을 내려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이제 더이상 내려놓을 것이 없다는 무언의 답변이었다.

그때 조주가 내뱉었다. “착득거(着得去)!” ‘정 내려놓기 싫으면 그대로 지고 가라’는 얘기다. 우두커니 서 있던 엄양은 비로소 깨달았다. 조주가 지칭한 것은 마음이었다. 온갖 번뇌와 갈등, 원망, 집착을 다 내려놓아라는 가르침이었다.

대한불교천태종 소속인 현재의 원원사에 들어서면 현대식 석축을 쌓아 신라고찰 터라는 분위기를 찾기가 힘들다. 돌을 쌓아 갖가지 꽃과 작은 나무들을 사이사이에 심어놓았다. 현재의 주지는 원원사 중창주 원원사 중창주 김영조(金榮祚) 대종사의 넷째아들이다. 첫째아들은 원원사 입구 조사암(祖師庵)의 주지다.

종루가 있는 오른쪽으로 돌아 돌계단을 오르면 옛 원원사터가 나온다. 장대한 석축을 이용한 산지가람으로, 현재 부도 4기와 동·서 삼층석탑만 남아 있다. 돌계단이 허물어진 채 옛 모습 그대로다. 비탈진 산 지형을 잘 이용한 흔적이 눈에 띈다.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2005년 4월7일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됐다. 2기의 삼층석탑은 십이지상과 인왕상들이 빼어난 솜씨로 조각돼 있다.

금당터 왼쪽으로 조금 가면 아주 작은 누각이 있다. 용왕을 모신 그림이 벽면에 그려졌고 바닥에는 우물이 있다. 우물과 이어진 구멍이 누각 밖으로 뚫려 있으며 이 구멍은 움푹하게 물길을 낸 돌을 통해 하수구로 연결돼 있다. 우물 하나에 들인 정성에 탄성을 지를것 같다. 글·사진=박철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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