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백두대간 제27구간(빼재~덕유산~육십령)
거리 31.0㎞, 시간 12시간40분, 산행일자 : 2016년 6월26일

▲ 넉넉한 심성을 지닌 덕유는 야생화 종도 다양하다. 무룡산에서 삿갓재로 내려서는 능선은 아름다운 덕유의 진경을 보여준다.

빼재에 서니 오전 2시, 유월 초하의 밤공기가 냉랭하다. 버스에서 내려 산행 준비를 하는 대원들의 손길이 바지런하다. 예상 밖의 쌀쌀한 기온 탓에 어물쩍 여유를 부릴 수 없는 까닭이다. 수령(秀嶺)이라고 쓴 빼재 표석을 뒤에 두고 제27구간을 시작하는 단체사진 촬영을 하고는 어둠속 덕유로 빨려들듯 진입을 한다.

덕유산은 큰 덕(德)자에 넉넉할 유(裕), 굳이 주석을 달면 글자 그대로 덕이 많고 넉넉한 산이다. 덕유의 주봉인 향적봉은 해발 1614m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 다음으로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충북 영동군과 전북 무주, 장수군, 경남 거창, 함양군 등 3개 도와 5개의 군에 걸쳐 넓게 산세를 펼치고 있다.

능선에 올라서니 풀잎에 이슬이 없을 정도로 건들바람이 분다. 하늘은 맑고 듬성듬성 구름 사이 반달이 돛단배처럼 빠르게 구름을 타고 흘러간다. 산꾼들도 저 달처럼 쉬지 않고 구름에 달 가듯이 지봉까지 내쳐간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지 지봉(池峰)에는 연못을 볼 수가 없었다. 지봉은 옛날에는 흰 구름 사이에 연꽃을 곱게 피워 올리던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봉에 들고나니 연꽃 대신 먼산 능선으로 동이 터오고 있다.

높은 해발고도로 기상변화 심해
식물변이가 종종 발견되는 지역
흡사 매화같은 박새꽃 따라 걷는
남덕유의 산세로 고단함을 잊어

하루에 열어 갈 길이 멀다. 도상거리로 빼재에서 육십령까지 덕유 주능선은 30㎞가 넘는다. 들머리 빼재에서 4㎞를 전후해서 나오는 갈미봉과 대봉은 길이 먼 관계로 휴식 없이 진행을 한다. 군락으로 피어 있는 비비추 꽃대가 란탄 불빛에 앙증맞은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자세히 보아줄 여유도 없이 길을 재촉한다.

▲ 남덕유산 곳곳에서 범의꼬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산꾼들을 맞아준다.

넉넉한 심성을 가진 덕유는 야생화 종도 다양하다. 무룡산 능선에서는 주황색 백합꽃을 만났다. 순간, 이렇게 높은 산 능선에 무슨 백합이 피었지 의문이 들었지만 니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백합과 유사한 ‘날개하늘나리’란 꽃이다. 남한지역에서는 덕유산과 태백산에서만 발견되는 날개하늘나리는 백합과 식물로, 백두산 근처에서 자생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어서 남한에서 발견되는 것을 학자들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종이라고 한다. 30여㎞에 걸쳐 해발 1200m를 상회하는 고도를 유지하는 덕유능선은 다른 지역에 비해 눈과 비가 많이 내리고 기상변화가 심해 식물의 변이도 종종 발견된다고 하니 이 또한 덕을 품은 산의 경이로움이라고 해야 할까.

 

지봉을 떠나 횡경재로 가는 길. 오전 5시30분께 잠시 해가 보이더니 백암봉에 도착될 무렵에는 더 짙어진 안개가 덕유를 온통 덮어버린다. 백암봉을 떠나 동엽령으로 가는 길, 조망 없는 ‘덕유평전’을 바람과 함께 걷는다.

노란 병아리 떼 같은 원추리가 화원을 이뤘던 여느 날의 덕유, 괭한 하늘을 이고 백설이 분분하던 덕유, 덕유평전으로 봄과 가을이 오던 길, 9000개의 소(沼)와 담(潭)이 있어 구천동이라고 멋모르고 우겼던 구천동 계곡, 동엽령에서 장수 안성으로 내려서면 7개의 못을 만들며 떨어지는 칠연폭포의 아름다움, 오래전 어느 봄날 전주에서 영동으로 오면서 처음 보았던 라제통문은 삼국시대에 낸 바위터널인가 했더니 일제강점기 때 낸 것이라 하여 크게 실망했던 곳, 덕유자락 거창 수승대…. 안개가 온통 시야를 가렸으니 기억속의 덕유를 모두 꺼내어 덕유평전에 뿌리며 걷는다. 이럴 땐 덕유와 마주하려면 열릴 때까지 걷든지 아니면 기다리든지….

무룡산으로 가는 중에 덕유가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하늘이 열리고 산이 열리고 산 아래 멀리 마을까지 열어준다. 흩어지고 모아지는 안개 사이사이로 맑은 빛이 내린다.

덕유의 장대하고 풍만한 산허리가 언제나처럼 유려한 모습으로 꿈틀거린다. 마치 신천지가 열리듯이 유월의 덕유는 열렸고 기다림 끝에 열린 풍광이라 대원들의 표정이 밝은 꽃잎과 같다.

춤을 추는 용의 모습과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무룡산(舞龍山)에 섰다. 삿갓봉에서 무룡산으로 이어지는 헌걸차고 장쾌한 능선의 모습이 흡사 용이 춤을 추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눈앞에 펼쳐진다. 무룡산에서 열어주는 풍광은 덕유의 멋을 고스란히 내어준다. 우뚝 솟은 남덕유의 동봉과 서봉의 산세는 말할 것도 없고 남덕유산에서 거창과 함양을 연결하는 37번 국도, 남령재에 내려섰다가 금원산과 기백산으로 이어지는 진양기맥의 산줄기가 유장하게 이어가는 모습을 읽어내기에도 눈이 모자란다. 진양기맥은 남덕유에서 발원해 황매산, 자굴산 등을 끼고 거창, 함양, 합천, 산청, 의령, 진주 등 서부경남 6개 시·군을 아우르다가 진양호에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159㎞의 긴 산줄기 이름이다.

 

무룡산에서 삿갓재로 내려서는 대원들과 산의 어우러짐을 보는 것 또한 품(品)자를 붙여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덕유의 진경이다. 삿갓재 대피소에서 남덕유산까지는 약 4㎞거리에 고도를 250m정도 올려야 한다. 빼재에서 지나온 거리만 약 20㎞에 육박하고 힘이 들만도 한데 대원들은 남덕유산으로 향하는 편하고 쉬운 지름길을 모두 사절한다. 덕유가 그려놓은 그림을 한 장면이라도 빠뜨리기가 싫은 것이다. 그렇게 남덕유산 동봉에 들고 서봉에 들었다.

능선에는 박새꽃이 매화처럼 피어 꽃길을 이루었고 범의꼬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산꾼들을 맞아준다. 불과 1.2㎞정도의 거리에 남덕유산 동봉이 1507m, 서봉이 1492m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지만 산이 열어주는 그림은 조금씩 다르다. 대원들은 동봉에서 충분히 산경을 즐겼음직 한데 서봉에 이르러 다시 자리를 잡는다. 대원들은 산이 보여주는 그림처럼 스스로도 유유해지고 싶은 것이다. 하늘에 뭉게구름은 비를 품을 줄은 모르고 부푼 솜뭉치만 자꾸 그리고 있다.

▲ 동봉과 서봉 구간 능선에 박새꽃이 매화처럼 피어 꽃길을 이루었다.

남덕유산 서봉에서 육십령 가는 길에 있는 할미봉(1026m)까지는 약 4.6㎞. 산정이 암봉으로 되어있고 뾰족이 솟아올라 까칠해 보이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풍광이 그저 그만인 곳이다. 고산(高山)과 고원(高原) 지대에 빙 둘러싸여 있는 지형적 요인과 날머리 육십령에 다 왔다는 안도감을 주는 산이기에 산정에 들면 한없는 평화가 산꾼의 가슴에 몰려든다. 할미봉에 든 대원들은 구름을 뚫고 내리는 빛과 불어오는 바람을 오감을 열어 붙잡는 모습들이다.

단 한번이라도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산이 되어준 적이 있는가?
산은 아니어도, 잠시 머물러 시름을 덜 수 있는
누군가의 바람자리라도 되었던 적은 있는가?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그 그늘아래 잠시 뙤약볕을 피해갈 수 있는
누군가의 나무가 되었던 적은 있는가?
작지만, 맑고 울림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누군가의 새벽을 깨우는 산새가 되었던 적이 있는가?
깊지 않고 졸졸거려도 누군가의 목마름을 씻어준
작은 샘이라도 되었던 적은 또 있었는가?
이름 모를 꽃으로라도 수수하게 피어
누군가의 느낌이 되었던 적은 있는가?
흔적 없는 바람으로라도 잠시 일어서
누군가의 땀을 씻어준 적은 있는가?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내려서는 등 뒤로 덕유가 그렇게 물어왔다. 나만의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좇아 즐겼을 뿐이지 스스로가 산이 되지 못했음을 덕유가 죽비로 정수리를 치며 일깨워주었다.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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