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전 외교장관 회고록 논란
한 구절만 떼어 이슈화하지 말고
당시 정세 등 종합적 판단 필요

▲ 이근용 영산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우리는 매일 수많은 뉴스, 정보, 광고를 보고 듣는다. 눈과 귀는 잠시도 쉬지 않고 새로운 자극을 지각하고 수용한다. 지각된 수많은 자극들 중 대부분은 금방 사라지지만 일부는 우리의 주의를 끌어 뇌 속에 살아남는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극들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기억이 된다. 인지적으로 보자면, 인간이 얼마나 잘 사느냐 하는 것은 이러한 기억을 얼마나 잘 쌓고 유지하고, 잘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새롭게 접하는 소식, 지식, 경험, 느낌은 기억이 되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기억이 오래 가기가 어렵고,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고, 결국에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지고, 정확한 기억으로 알고 있던 것이 나중에 잘못된 기억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메모를 하고, 색다르고 아름다운 광경을 접했을 때 사진을 찍고, 오래도록 정확하게 전하고 싶은 사실이 있을 때 기록으로 남기고 하는 것은 모두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이다.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상품이나 서비스를 얼마나 잘 기억하게 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광고 메시지를 반복해서 노출시킨다든가, 유명 모델의 이미지를 상품이나 기업의 이미지와 연관시킨다든가, 인상적인 에피소드 스토리를 통해 상품을 연상하게 하는 기법 등을 동원하는 것이 모두 소비자들이 상품을 오래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광고뿐만 아니라 개인이 사회 각 분야에서 업적을 이루고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것도 후대 사람들이 자신을 오래 기억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는 독자나 시청자들이 기억할 만한 일을 취재해서 보도하는 일을 일차적인 업무로 삼는다. 과거에는 기억할 만한 사건, 사고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을 소수 미디어가 독점하고, 지면이나 채널이 한정돼 대중들이 사건의 실상과 전모를 알고 기억하게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다양한 채널과 플랫폼을 통해 기억할 만한 일을 저장, 배포하는 일을 할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다. 다양한 미디어가 대중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이슈를 기억하게 하는 데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는다.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정보 접근의 제한으로 보도를 하지 못하는 사안도 존재한다.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거나 국가 기밀과 관련된 것은 미디어가 직접 다루지 못한다. 이것은 기록으로 남겨져 법령으로 정한 일정 기간 후에 공개된다. 미디어가 취재하기 어려운 사항들은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겨지기도 하지만, 중요한 직책을 수행한 사람들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 집필하는 회고록을 통해서 공개되기도 한다.

작년에 한국의 유교책판,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총 13건의 아시아 최다, 세계 4번째 등재기록을 가진 우리나라는 기록문화 강국으로 자부하고 있다.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이 등재된 이래,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팔만대장경, 조선왕실의궤, 동의보감,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일성록, 난중일기, 새마을운동 기록물 등이 그동안 순차적으로 등재돼 왔다. 기록은 이처럼 훌륭한 문화유산이 되고 역사가 된다.

정보 강국임을 자부하는 디지털 시대에 네티즌들이 펼치는 활발한 블로그, SNS 활동, 채팅 및 메시지 공유 활동 등에서 기록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살아있음을 본다. 공공기관기록물관리법, 대통령기록물관리법 등의 관련 법령에 따라 국가기록물이 관리되고 있는 것도 기록문화의 전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재벌 총수들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은퇴 후에 회고록을 내는 것도 그 전통의 일단으로 읽힌다.

미디어는 기억의 유지와 기록의 보존 사이의 어디쯤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은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지나간 미디어를 검색할 수 있고, 후대의 어느 역사가는 사료로서 미디어 기사를 활용할 수 있다. 미디어의 기사 한 줄, 사진 한 장은 기억을 회상시키는 단서가 되고, 미디어의 촘촘한 보도는 내일의 역사가 된다.

최근 일고 있는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의 일부 내용에 관한 논란도 그 해법은 당시의 미디어 보도에 있을지 모른다. 당시 보도된 미디어의 기사 속에서 국제정세의 역학 관계나 정치권의 움직임에 비추어 진위나 적합여부를 판단할 사안이지, 맥락을 생략한 채 단편적으로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기록의 한 구절만 떼어 이슈화하는 것은 논리가 궁색하다.

이근용 영산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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