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생사(生死)와 기독교사상

 

인류사를 통틀어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삶과 죽음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속 망각의 시각에서는 삶은 영원하고 죽음은 멀리 있는 것으로 눈앞의 득실에 사소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죽음은 자연적 현상이 아닌 원죄로 인한 징벌로 해석
육신은 사라지지만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영원히 살아
유일신 사상, 조상신 모시는 제사조차 용납되지 않아

시작은 끝을 전제로 하고 있듯이 어머니의 품에서 세상으로의 탄생이 있었다면 다시 세상의 품에서 죽음으로의 재탄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어떤 것이든 아니면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든 생사에 대한 각자의 견해는 다양할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거대한 물음이 없었다면 과연 종교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종교가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으로서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진실의 영향은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각각의 종교가 다양하듯 인간의 삶도 천차만별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과 죽음 또한 여러 형태로 정의하고 있으며 사람마다 믿고 있는 방식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종교사에서 기독교는 1600년의 불교나 유교에 비하면 아주 최근(130여년 전)에 전래된 새로운 종교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한국 근현대의 정치, 사회, 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종교(유교, 불교, 천도교 등)와 비교할 때 사생관(死生觀)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을 표방하고 있으며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인 반면에 기독교는 신에 대한 절대 의존적이며 그 가르침의 본질은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서 기원전 4세기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인생이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안에서 옥살이하는 질곡(桎梏)이요, 죽음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사’라고 하였다. 이 것은 죽음은 단지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뜻하고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오히려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로서, 바울은 기독교에서 고유의 영혼불멸설을 확립하였다.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가 천국인 구원으로서 천국은 ‘하나님이 천국천사와 함께 성도를 기다리시는 곳,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곳, 기쁨과 영광 그리고 빛이 충만한 곳’으로 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 하신 일)신앙을 수용하고 믿는 자는 심판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시록 21:4) 즉 천국은 저주가 없는 곳이며(계시록22:3) 마귀 사탄의 유혹도 없는 곳(계시록20:10), 목마름과 상함의 고통이 없는 곳(계시록7:16)이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즉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였는데 아담과 하와에 의한 원죄로 인간은 죽음이라는 징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

그리고 영생과 부활을 믿는 종교로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 26)라고 하였다. 믿음이 바로 구원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다가 죽으면 육신은 자연으로 사라지지만 영혼은 신의 심판을 받아 사후세계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천당이나 지옥은 시간적 개념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의 영역으로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즉 죽음은 생명의 끝남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하나님 곁으로 보내기 위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한다. 또한 우주 공간에 오직 한 분인 유일신(唯一神)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인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하늘나라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조상의 영혼을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초대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종말(終末)이 오고 예수가 다시 내려오는(再臨)날, 이 세상의 모든 산자와 죽은 자는 그 앞에서 심판을 받고 결과에 따라 구원을 받는데 산자는 산대로, 죽은 자는 부활해서 들림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 것이 재림이요 휴거(携擧)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배할 때마다 주기도문과 함께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使徒信經, 사도신경)하고 기도한다.
 

▲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인간에게 삶은 누구에게나 한번으로서 유한하다. 그래서 무한을 동경하고 영원을 갈망한다.

인간으로서 경험 밖의 영역인 죽음을 비롯하여 한계를 넘어선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으며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서 무신론자도 어려움이나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신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종교를 믿든 아니면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든 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일상의 윤리관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이 사랑하듯 서로 사랑할 것을 권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권하고 있다.

이미 태어난 이상 누구나 번민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든 좋은 교리와 훌륭한 종교인들이 많은 종교에 번민의 답을 맡기는 것도 삶의 한 방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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