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mouflage - 김은아 作. mixed media 65.1×90.9cm.

내 얼굴은 수많은 역할에 따라 다르게 표상된다. 따라서 나/자아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내 안에는 무수한 내가 있어서 여러 종류의 다채로운 얼굴/가면을 쓰고 있다. 자아가 단일하다고 혹은 불변하다고 믿는 것, 나아가 자아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다. 나란 과연 실재하는가.

아침 마다 우리 집 작은 마당에는 고양이 네 마리가 현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집 마당냥이들이다. 일 년 전 깊어가는 가을 이맘 때쯤 만난 녀석들이다.

가을비 온 뒤 끝이라서 그런지 찬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다. 아침 대문을 열다가 나는 골목길 가득 날아다니는 쓰레기들에 당황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쓰레기 봉투들이 저렇게 난장을 피운 적이 없었다. 휴지 날리는 골목 전깃줄마저 하늘에 세든 부랑자 같은 날이었다. 작은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골목길이 이렇게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한 두개도 아닌 집집마다 내놓은 봉투들이 죄다 찢겨져 가만히 서 있질 못하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로 골목길에 드러누워 있었다.

우연히 집 마당에 들인 ‘길양이’네
어설픈 캣맘이 되어 공존을 배운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소중하듯
길 위의 그 삶에도 평안이 함께하길

빗자루를 들고 날아다니는 전투의 흔적을 쓸어 담았다. 차 밑으로 날려간 휴지를 줍느라 몸을 엎드렸다. 눈이 마주친 고양이 한 마리. 배고픈 길냥이들이 기름기 배인 휴지를 먹이로 착각을 하고 쓰레기 봉투들을 찢어 놓은 것이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 그 눈 속에 갇혀 있던 배고픔이 그때 내게로 전이돼 왔었다. 집에 있던 참치 캔을 따서 차 밑으로 밀어넣어 주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대문 밖에 밥과 물을 주다가 조금씩 밥자리를 옮겼다. 결국 마당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며칠 동안 삼색냥이라 부르며 친근감을 쌓아 갔다. 일주일 쯤 지나자 삼색냥이는 제법 큰 새끼 세 마리를 데리고 왔다. 2층계단 귀퉁이 택배 박스로 집을 만들어 주었다. 일양이, 이양이, 삼양이 이름도 붙였다.

봄이면 모든 생명들이 깨어나듯이 길 위의 생명들도
봄이면 꽃처럼 피어서 몸을 열고 새 생명을 품는다는 것을
뒤 돌아보는 여유도 없이 살아온 내게 가르쳐주는 삼색 냥이
그 창고 귀퉁이 택배박스에 무릎담요를 깔아놓고
창구멍을 내고 밥그릇 물그릇을 들이고 같이 살아보자고
이 찬란한 봄, 나는 어설픈 캣 맘이 되어 보기로 했다 (‘길, 묘연2’의 일부)

우리나라 길고양이 평균 수명은 2~3년 정도 된다고 한다. 집안에서 돌봄 받는 집고양이들에 비하면 현저히 생이 짧다. 사람들이 먹다버린 염분이 든 음식 찌꺼기를 먹고 염분을 배출하지 못해 몸 속 장기들이 망가지기도 하고 또 교통사고도 당하기 때문이란다. 염분 때문에 몸이 퉁퉁 부은 길고양이들은 음식 찌꺼기를 먹고 살이 쪘다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깨끗한 물과 한 줌의 사료만 주어진다면 위험한 길 위의 생활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골목길 이웃들에게도 길고양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밥을 주니 쓰레기봉투를 찢지 않아서 골목길이 깨끗해졌다고 나름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물론 아침 마다 대문 밖 청소도 열심히 한다. 눈 마주치는 이웃에게 커다란 소리로 인사도 나눈다. 이웃들이 우리집 마당 냥이들을 귀찮아할까 공연히 혼자 부산을 떠는 것이다.

녀석들은 가끔씩 보은한다고 그러는지 죽은 쥐들을 대문 밖에 물어다 놓아 대문 열다가 기겁을 하게 한다. 때로는 적의 가득한 경계심을 풀고 골골송도 들려주기도 한다. 햇살 가득한 마당 잔디 위에서 해바라기하는 녀석들을 바라보는 기쁨도 쏠쏠하다. 이 세상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은 다 소중하다. 길 위의 생명들, 그들의 삶도 더 이상 힘들지 않기를 바래본다.

어느새 녀석들이 우리 마당 박스집에 들어온 지도 일년이 조금 지났다. 지난 여름, 치열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다시 가을이다. 색색이 마당에 들어앉고 있다. 곧 마당의 푸르른 잔디도 쌀쌀한 바람에 익어 노랗게 물들어 갈 것이다. 이층 계단에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냥이들 때문에 늦잠을 포기했지만, 아침 마다 마당에서 밥 먹는 녀석들 맑은 눈 속을 들여다보면 공존의 삶에 희망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내 배가 부르다. 그 아침 시간이, 내게는 빛이 나는 시간이다.
 

▲ 김은아씨

■ 김은아씨는
·Solo Exhibition
·2016, 2015 흐르는땅 태백-묘한 느낌 (철암탄광역사촌)
·2014 문예진흥기금 작가지원 (울산문예회관)
·2013 Art Seoul 부스개인전 (서울예술의전당)
·2012 신진작가 프로젝트전 (갤러리 온, 서울)
·2016 아시아 미술제-청춘본심(성산아트홀,창원)

▲ 조덕자씨

■ 조덕자씨는

·시인
·1997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 심상시인회 회원
·제1회 울산작가상 수상
·시집 <가구의 꿈> <지중해 불루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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