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5)6대 총선과 정창화

▲ 백암 정창화씨가 60년대 국토개발공사에서 근무할 때 범서읍 진목부락 황무지 2만평을 개간하기 위해 직접 쟁기질을 하고 있다. 이후 얼마 있지 않아 그는 민주공화당 울산지구당 조직에 참여하게 된다.

5·16후 2년 7개월의 군정을 거쳐 1963년 11월 치러진 6대 총선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우선 선거구역의 확대로 선거구가 과거 239개구에서 133개구로 줄어들어 울산도 과거 갑·을구 2개 선거구로 나누어 2명의 국회의원을 뽑던 것을 울산과 울주를 합해 1명의 의원만 선출하게 되었다. 전국구가 도입된 것도 이 때다.

피마자 재배로 농촌 수익증대 기여
부산일보에 소개, 전국적 명성 얻자
박정희 공화당 창당때 최우선 접촉
민주공화당 울산지부 1호 당원으로
갖은 노력에도 첫 공천 후보 ‘석패’

선거결과는 공화당이 전국구를 합해 175석 중 110석, 민정당이 41석, 민주당이 13석, 자유민주당이 9석, 국민의당이 2석을 각각 차지했다.

야당 후보들이 혁명 후 권력싸움으로 내홍을 많이 겪었던 공화당 후보들에게 이처럼 참패한 것은 5·16후 정치 규제로 야당 정치인들이 제대로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금 후에도 행동통일을 보이지 못하고 당리당략에 매달려 싸움을 그치지 않은 것 역시 야당 참패의 요인이었다. 당시 야당이 얼마나 난립했던지 울산만 해도 자민당의 이인수, 보수당의 김병룡, 민주당의 최영근, 민정당의 박태륜씨 등 야당 후보가 한꺼번에 출마했다.

1963년 1월 혁명정부가 정치활동 재개를 허용하자 야당은 울산지구당 재건을 위해 김수선, 정해영 전 의원과 윤복이 대동건설 사장, 정성찬 상북양조장 사장, 부산에서 인쇄업을 하고 있던 신사환씨를 선정, 울산에 파견했다.

당시 울산 야당의 대부로 활동했던 김재호 박사는 이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김 박사는 이 무렵 옥교동에서 대동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혁명정부 연장을 반대하다가 농소로 쫓겨가 호계역 앞에서 병원을 차려 놓고 의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호계에 살면서도 어려운 야당 인사들을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 신망이 두터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정치권은 지역 여론보다 당리당략에 따른 계보를 중시하다보니 이처럼 민심을 외면할 때가 많았다.

5명의 야당 조직책은 학성여관에서 ‘야당 조직책 발기인 대회’를 열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중앙조직이 통일되지 못해 결국 각 당에서 후보를 출마시켜 4명의 야당 후보가 한꺼번에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야당이 이처럼 후보 선정을 놓고 지리멸렬하는 가운데 여당인 공화당은 철저한 비밀 속에 당 조직을 만들어갔다. 공화당은 당 조직을 처음부터 김종필이 이끄는 중앙정보부가 맡았다.

당시 공화당이 울산지구당 창립을 위해 접촉했던 인물이 백암(白庵) 정창화(鄭昌和)씨였다. 당시 백암은 배철수 국가재건국민운동 울산지부장과 함께 농촌개발의 일환으로 범서에 농장을 얻어 피마자를 열심히 키우고 있을 때였다. 이 사업은 곤궁했던 농촌 수익을 크게 올려 부산일보 이철응 기자가 보도를 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백암은 2008년 발간한 자서전 <격랑의 시대를 살다>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그려 놓고 있다.

‘혁명에 성공했던 박정희 장군이 몰래 공화당 창당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경남도 책임자가 예춘호씨였는데 그 아래 이종근이라는 울산 출신의 젊은이가 있었다. 내가 이씨를 처음 만났던 것은 국민운동 중앙교육원 1기생으로 함께 연수를 받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씨가 울산으로 와 학성여관에서 만났는데 그는 “그동안 국민운동을 하면서 청년지도자들을 배출하느라고 우리 둘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 경험을 살려 당 조직 활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이씨는 아무 말도 않고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후 이씨가 상부의 지시라면서 다시 울산으로 왔다. 그리고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당 조직은 철저한 비밀 속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당 조직의 비밀을 안 이상 이 일을 울산에서 맡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고 말해 반승낙을 하고 말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이씨는 처음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당으로 돌아가 윗사람으로부터 면박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언급되는 예춘호씨는 부산 영도 출신으로 나중에 최형우 의원과 함께 야당 활동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울산과 인연이 깊다.

그는 6·10항쟁 때 현 울산대병원 김문찬 건강증진센터 소장이 군사정권에 반대하다가 구속되었을 때 최형우 민추협 간사와 함께 정동기 담당 검사를 찾아가 항의를 하기도 했다. 정 검사는 나중에 이명박 대통령 때 민정 수석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3선 개헌을 반대해 공화당을 떠나게 되는 예씨는 나중에는 정주영 회장이 이끄는 국민당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백암은 민주공화당 울산지부 제1호 당원이 되어 공화당 울산지부 사무국 조직을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당원이 된 후 그는 부산으로 가 예춘호 경남도지부장을 만났다. 이때 예 지부장은 당 조직 활동과 관련, 철저히 비밀을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 혈서를 쓰라고 해 예 지부장이 보는 앞에서 혈서를 썼다.

백암은 “당시 혈서를 쓰면서 저는 박 대통령을 비롯한 혁명세력들이 이처럼 일을 철저히 하니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창당 작업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고 말한다.

백암을 공화당에 천거했던 이종근씨는 고향이 울산 남창이지만 부산대 졸업 후 부산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백암이 국민운동 본부에서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면식이 없었다.

이씨는 공화당 집권 후 당을 떠나 한국비료 상무로 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 무렵 중앙당은 울산지구당 사무국장으로 김해두씨를 임명했다. 김씨는 당시 경남도 내무국장으로 있었는데 그를 사무국장으로 천거한 사람이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김씨는 이 실장의 울산 농고 한해 선배로 경남 도청에 근무하면서 고향 후배들을 잘 챙겨 신망이 두터웠다. 현재 반구동에서 길메리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양희씨가 그의 딸이다.

김씨는 사무국장에 선임되었으나 임지로 오지 않아 당 조직은 실제로 백암 혼자 했다.

당시 백암은 북정동 최민곤씨 집 아래채에 세 들어 살았는데 사무국 조직은 물론이고 당원 확보를 위한 대부분의 활동이 이 집에서 이루어졌다. 최씨는 축구왕 최성곤의 동생으로 나중에 최형우가 이끄는 신민당 울산지구당 부위원장 직을 맡는 등 울산을 대표하는 야당 인사가 된다.

백암은 당 조직 활동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강동에서는 윤종훈씨를 앞세워 당 조직 활동을 벌였다. 윤씨는 당시 이미 강동 면장과 면의회 의장까지 지내 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병영에서는 윤남국씨가 도와주었다. 그 역시 병영 면장과 면의회 의장을 지냈던 병영 유지로 백암을 자식처럼 도와주면서 당 조직에 최선을 다해 주었다.

백암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울산은 오위영과 최영근 등 야당 인사들을 많이 배출한 야당 도시였지만 예상외로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여당인 공화당에 기대를 걸고 당 조직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때만 해도 교통수단이 지금처럼 좋지 않아 백암은 병영은 물론이고 강동까지도 걸어 다닐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밤에는 매일 중앙당에 활동보고서를 올려야 했기 때문에 밤을 세울 때도 잦았다. 이 때 가장 많은 고생을 했던 사람이 부인 김정숙 여사였다. 당시 김 여사는 백암을 돕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뒷바라지 해 주느라고 많은 고생을 해 주위 사람들이 ‘하숙집 아지매’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백암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울산지구당 후보로 공천을 받았던 김성탁씨가 민주당의 최영근 후보에게 14표 차로 지는 바람에 백암은 분루를 삼켜야 했다.

백암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연택씨가 외교관으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고 자신은 부인을 먼저 보낸 후 무거동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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