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버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깊어가는 가을, 알록달록 예쁜 산들이 여기저기서 부른다. 마음이 동하기도 전에 몸은 벌써 가을산행 중이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자 무엇인가 머리를 툭 건드리고 산길에 나뒹굴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를 대로 오른 온전한 모양의 도토리였다. 반가웠다. 올해는 도토리가 흉년이고 사람들이 도토리에 욕심을 내는 바람에 멧돼지가 먹을거리가 없어 민가까지 내려왔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벼이삭 냄새를 맡고 흉년인지 풍년인지를 미리 알고 흉년이 들면 동물이 굶어 죽을까봐 도토리가 많이 달린다는 상수리나무 군락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수분함량 많아 포만감·지방흡수 억제
중금속 해독·모세혈관 튼튼하게 해줘
다량의 타닌성분으로 변비유발은 단점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양볼 가득 도토리를 물고 이곳저곳 왔다 갔다 하는 앙증맞은 다람쥐부부를 발견했다.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팔짝팔짝 날도 참말 좋구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바위 밑 나뭇잎 속을 파헤치고 도토리를 꽁꽁 숨기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렇게 묻어두고 겨우내 도토리를 찾아 헤매는 다람쥐를 상상하니 꼭 지금의 나를 보는듯했다. 잊어버림으로 많은 것을 얻은 우리! 다람쥐는 씨앗을 심는 숲 지킴이가 되었고 나는 어느새 긍정의 아이콘이 되어있었다.

나는 도토리가루로 여러 가지 요리를 해 먹는다. 가공된 음식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천연식품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묵, 수제비, 전, 떡, 죽으로 만들어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면서 개운하고 건강해진 느낌이 든다. 며칠 전 학교에서 도토리 묵채국을 맛있게 먹던 2학년 아이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딱딱한 도토리는 다람쥐가 먹고 탱글탱글 맛있는 도토리는 우리가 먹지요. 도토리는 참 좋은 친구예요.”

맞는 말이다. 도토리는 예부터 흉년이나 천재지변으로부터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은 자원이었다. 근래에는 자연식품, 저열량식품,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간식이나 안주로 애용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토리를 식재료로 이용한 우리나라 어머님들의 지혜는 놀랍다. 하지만 건강한 산림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토리나무 인공재배지나 일부 채집 가능한 장소에서만 도토리를 수집해야만 한다.

<동의보감>에는 늘 배가 부글거리고 끓는 사람, 불규칙적으로 또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대변을 보는 사람, 소변을 자주 보는 사람, 몸이 자주 붓는 사람은 도토리묵을 먹으면 좋다고 기록돼 있다.

도토리에 든 타닌(tannin)성분은 요리과정 중 많이 없어지게 되는데, 남아있는 타닌의 양이 알맞으면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해준다. 아콘산(acornic acid)은 중금속 해독에 탁월한 효능을 보인다. 도토리묵은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고, 성인병 예방과 피로회복 및 숙취회복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등 여러 효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요즈음에는 다이어트식품으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수분함량이 많아 포만감을 주는 반면 칼로리는 낮고, 타닌 성분이 지방흡수를 억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닌이 있기 때문에 변비가 있는 사람은 삼가는 것이 좋다. 타닌 성분이 변비를 심하게 하고 철분이 타닌과 결합해 철분의 흡수를 방해하여 빈혈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토리와 감은 타닌이 많이 함유된 식품으로 같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 박금옥 개운초등학교 영양교사

오래전 산행 길에 오늘처럼 도토리를 만났다면 쾌재를 부르며 있는 대로 주워왔을 텐데 지금은 절대 아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군. 이제는 다람쥐 먹이까지 빼앗아 먹으니 말이다.” 언젠가 산행 길에 정신없이 도토리를 줍고 있는 내게 남편이 던진 말이 도토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해주었다. “다람쥐가 건망증이 심하잖아요. 겨울이 오면 굶어죽을까 봐 냉동고에 보관해두었다가 겨울에 뿌려줄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하는지 꼭 두고 볼 거야” 욕심을 부린 내 자신이 부끄러워 그해 겨울 얼려둔 도토리를 하얀 눈밭에 뿌려주었고 그 후로는 집 근처 선암호수공원에 산책 갈 때면 도토리를 주워 도토리저금통에 꼭 저금하고 온다.

오늘 가을산행에서 만난 도토리는 아무도 찾지 못하게 더 꼭꼭 숨겨두고 왔다. 가을풍광이 오롯이 내 품안에 들어왔다. 탱글탱글한 도토리가 주는 건강함보다 더 큰 기쁨이 밀려왔다. 버리면 비로소 느껴지는 가벼움이야말로 세상사는 이치가 아닐까 한다.

박금옥 개운초등학교 영양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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