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백두대간 제28구간(육십령~영취산~백운산~복성이재)
거리 30.1㎞, 시간 12시간15분. 산행일자 : 2016년 7월10

▲ 백운산에 진입하자 지리산 주능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야봉(般若峰)에서 천왕봉(天王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정점 지리산(智異山)이 키 낮은 연봉 뒤로 웅장하게 늘어서 있다.

육십령이 산행을 준비하는 대원들로 분주하다. 이날도 지난 27구간 덕유산 주능선에 이어 하루에 열어갈 길이 멀다. 간단한 요기와 함께 준비를 마친 대원들은 망설임 없이 어둠이 깔린 산속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우기의 어두운 산속, 습도는 높고 바람은 없다. 대원들은 바람기 없는 산길에서 풀잎에 맺힌 이슬보다 먼저 땀으로 옷을 적신다. 고산지대의 밤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 법도한데 숲속은 열대야처럼 갑갑하기만 하다. 급한 경사로를 빠르게 오르는 대원들의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이윽고 밤안개가 넘어가는 능선 억새밭을 통과할 즈음, 마치 비를 뿌려놓은 것처럼 물기를 머금었던 억새풀이 지나가는 대원들을 차갑게 휘감으며 온몸을 적셔준다. 땀에 젖고 이슬에 젖고 산행이 고행이 되는 모습들이지만 푸념을 늘어놓는 대원은 없다.

역사의 흔적을 사이사이 품고
덕운봉 능선에는 논개 생가도
억새 군락지는 초목 걷는 느낌
편안한 산책로처럼 산길 걸어

산행 시작 1시간여 만인 오전 4시, 육십령에서 약 3㎞지점의 구시봉(해발 1014.8m)에 들었다. 산은 아직 캄캄한 먹빛에 싸여있고, 산 아래 멀리 경남 함양 서상면 지역의 가로등 불빛만 평온하게 빛나고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구시봉 정상에도 바람은 없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대원들이 갖고 있는 휴대전화에는 폭염주의보 메시지가 속속 도착을 한다. 열어가야 할 길도 만만치 않은데 바람기 없는 산이 해가 나면 얼마나 뜨거울까 싶어 염려가 된다.

▲ 봉화산군에 이르면 억새 군락지가 능선을 따라 검푸르게 이어진다. 막힘 없는 능선은 구불구불 유려하고 잘 조성해 놓은 목초지를 걷는 것처럼 장쾌하다.

구시봉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덕운봉으로 가는 길. 구시봉과 덕운봉 사이 대간 능선을 가운데 두고 산 아래, 서쪽 전북 장수 계남면에는 의암 주논개(義菴 朱論介)의 생가가 있고 동쪽 함양 서상면에는 주논개의 묘소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온 나라가 아픔의 수난을 겪는 중, 진주 남강에 결연히 몸을 던진 의인(義人)의 생(生)과 사(死)가 대간 능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다.

아픈 삶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산을 넘어 타관으로 갔다가 왜장을 껴안고 꽃잎처럼 남강에 투신하는 의로운 일을 행하고서도 산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한 많은 여인 의암 주논개. 역사가 아프면 민초도 아플 수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흔적이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전설처럼 남아 있다.

 

덕운봉(德雲峰·983m)에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돌아봐지는 풍광이 산의 이름과 똑 같다. 그렇게 짙지 않은 안개가 부분적으로 마을과 산을 가렸지만 지나온 남덕유 동봉과 서봉에서부터 오늘 걸어온 덕운봉까지 능선을 쭉 연결해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가야 할 영취산과 백운산이 흰 구름을 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수시로 대간 능선을 넘어가는 안개는 덕운봉을 더 신비롭게 그려주는 모습이다. 이와 같은 풍광 때문에 산의 이름이 덕운봉이 되었나보다.

오전 6시30분을 전후해서 전 대원이 영취산에 들었다. 영취산은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분기 봉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영취산에서 장안산(長安山), 마이산(馬耳山)을 거치고 진안 주화산(珠華山)까지 63.3㎞의 산 능선을 잇다가 주화산에서 북으로는 금남정맥, 남으로는 호남정맥으로 갈라진다.

금남정맥은 금강의 남쪽 산줄기를 약 128㎞ 이어가서 부여 부소산(扶蘇山)에서 백마강에 맥을 다하는 능선을 이른다. 호남정맥은 섬진강 줄기를 따라 맥을 이어서 호남의 명산들을 순례한 뒤 광양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약 400㎞의 산줄기를 말함이다. 영취산 정에서 약 50분간 폭염을 대비해 넉넉히 쉬면서 재충전 시간을 가진다.

이번 구간의 최고봉은 해발 1278m의 백운산(白雲山)이다. 영취산과는 약 3.5㎞ 정도 거리를 두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산 높이에 비해 산행에 크게 부담을 주는 지형은 아니다. 백운산으로 가는 중에 뭉게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열리더니 백운산에 들어 앞을 보니 정남쪽으로 지리산 주능선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키 낮은 연봉들의 맨 뒤로 마치 하늘의 성체처럼 반야봉(般若峰)에서 천왕봉(天王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정점 지리산(智異山)이 웅장하게 늘어서 있다. 목표점에 다 와 간다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모두들 아득히 보이는 지리산 원경에 목을 늘인다.

 

백운산에서 이어지는 대간 길은 중재까지 약 4.2㎞ 거리에 630m 정도의 고도를 꾸준히 낮추는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중재에 도착해서 보유하고 있는 식수 상태를 점검해보니 찌는 듯한 더위에도 경험 많은 대원들이라 양호한 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함양 백전면 방향으로 200m쯤 이동을 해 수계가 시작되는 곳의 샘에서 여유분의 식수를 빈 수통에 채웠다. 보충한 식수는 산행 말미에 요긴하게 몇 대원들의 갈증을 달래주었다. 종주 산행 중에는 식수 보충이 가능한 곳을 미리 파악해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백운산에서 중재까지 고도를 많이 낮추었으니 이제 다음 산길을 잇기 위해서는 오름길을 부지런히 올라야 한다. 낮 12시를 향해 갈수록 기온은 자꾸 높아가고 긴 오름길에 대원들을 땀으로 목욕을 한 모습이다. 월경산(月鏡山)과 봉화산(烽火山)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는 모든 대원이 월경산에 들지 않고 봉화산 방향으로 곧바로 진행한다.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약 250m 정도 벗어나 있는 월경산 정상은 모두가 외면을 한 것이다. 더위가 산 꾼들의 산에 대한 호기심마저도 거두어버린다. 곧이어 오늘 산행 중, 가장 조망 좋은 암능지역을 통과하면서도 여유롭게 주변을 돌아볼 사이도 없이 서둘러 발걸음들을 옮긴다. 햇볕에 달구어진 바위에서 내뿜는 열기가 마치 한증막 속처럼 뜨거웠기 때문이다.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봉화산군에 이르게 되면 나무 한 그루 없는 억새 군락지가 능선을 따라 검푸르게 이어진다. 막힘없는 능선은 구불구불 유려하고 바람이 없어도 흡사 잘 조성해 놓은 목초지 위를 걷는 것처럼 장쾌하다. 산 아래로 백두대간과 지리산에 둘러쳐진 아영(阿英), 운봉(雲峰), 인월(引月) 등 고원마을이 목가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길섶에는 패랭이꽃이 피어나 뜨거운 계절을 반겨 맞았고, 대원들은 뜨거운 날 더 뜨거운 열정으로 산길을 헤쳐가고 있다.

조금은 길었던 28구간 산행도 봉화산에 서면 이제 다 왔다는 생각이 든다. 복성이재까지 약 4㎞ 정도 더 걸어야 산길에서 내려서지만 대체로 봉화산에서부터 내리막길이고 철쭉으로 산봉우리를 뒤덮은 매봉이 있기는 해도 길은 편안한 산책로처럼 거칠지가 않다.

폭염경보가 내렸던 이 하루, 더러는 이슬에 젖고 더러는 땀에 젖었다. 바람기 없는 곳에서는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며 걸었다. 무엇을 줄 것도, 무엇을 받을 것도, 우리를 기다리는 그 무엇도 없는 산길을 무모하다 싶으리만치 걸었다. 이 길의 끝에 서 있을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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