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끝) 관가 ‘술한잔’ 관행 사라져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울산의 한 지자체에 근무하는 A씨의 일상에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업무의 양과 귀가시간이다. 수첩을 빼곡히 채웠던 만찬 일정에는 빨간줄이 그어졌다. 핵심업무였던 각종 간담회가 9월28일 김영란법 시행이후 공식적으로 한건에 그치면서 상대적으로 이에 대한 업무비중도가 낮아졌다. 그동안 일과가 끝난 후 밤늦게까지 지속돼 왔던 간담회나 직원 단합회 등도 줄면서 밤 문화도 바뀌었다.

비교적 민원 접촉빈도가 높은 부서에 근무하는 B씨는 법 시행이후 공휴일을 뺀 20여일 중 16일을 구내식당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해결했다.

“오전에 민원과 관련해 해당 부서별 회의를 하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응당 점심을 함께하며 협의를 연장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게 사라졌다. 직원들간 저녁 모임도 오해를 살수 있어 거의 생략하고 있다”고 B씨는 전했다.

부서회식도 당분간 최소화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각자내기를 하면 식사비용이 3만원이 넘어도 되지만 법 시행초기인 만큼 지역 관가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법 적용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울산의 관가에서는 지금껏 ‘관행’이라는 묵인아래 이뤄졌던 언행, 무심코 오고갔던 ‘성의’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민원인들은 물론 동료들과의 “밥 한끼하자” “술한잔 하면서 이야기 나누자”라는 의례적인 인사치레가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서게 됐기 때문이다.

정가 “시범케이스 걸릴라” 경직
유권해석 나올때까지 관망 추세
수의계약 등 업무적 접촉도 피해

공무원뿐 아니라 시·구의원들도 몸사리기는 마찬가지다.

한 울산시의원은 최근 지인들과의 저녁자리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옆테이블에 앉은 손님이 “김영란법이 시행됐는데 시의원이 다른사람과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괜찮은가요”라며 오해의 눈길을 보낸 것. “20년지기 친구들인데다, 계산은 각자 더치패이 할 것이다. 제발 오해하지 말아라”며 2~3차례에 걸쳐 해명아닌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법 시행이후 지금까지 울산시 청탁금지법 신고센터에 접수된 건수는 한건도 없다. 그야말로 “시범케이스에 걸리지 말자”는 경직된 분위기가 한달내내 지역 정가를 휘감고 있다.

이런탓에 일부에서는 공식행사가 아니면 외부기관이나 민간인과의 접촉을 아예 꺼리는 ‘복지부동’ 행태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행정업무 중 가장 큰 변화가 감지되는 분야는 수의계약 시장이다. 수의계약은 행정기관에서 적당한 사업자를 골라 공사와 용역, 물품납품 사업을 발주하는 계약방법이다. 이에 계약을 따내기 위한 물밑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돼 왔다. 그러나 김영란법으로 공직자들이 불필요한 구설에 오를까 업자들과의 접촉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구가 있는 시의원들의 경우 각종 현안문제 해결이나 예산확보 등을 통해 일꾼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하지만 이같은 활동 자체가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의장과 부의장, 각 상임위원장에게 매달 일정금액의 업무추진비가 책정돼 있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자칫 잘못 사용했다가 김영란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는 의견도 나오면서 유권해석이 나올때까지 관망하는 분위기다.

한 시의원은 “현재로선 민원인은 물론 누구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지역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예산을 건의하는 것도 자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면서 “부정한 청탁을 막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법이 시행되면서 정당한 활동도 위축되고 있는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이형중기자 leehj@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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