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무궁화(無窮花)

▲ 무궁화는 원산지가 우리나라이면서 은은한 색을 지니고 있으며 고귀하고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우리민족의 꽃이자 나라꽃인 국화(國花)이다. 무궁화(無窮花)는 ‘무궁한 꽃’이라는 의미로 계속하여 피고 지는 꽃이라 할 수 있다.

무궁화는 원산지가 우리나라이면서 은은한 색을 지니고 있으며 고귀하고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우리민족의 꽃이자 나라꽃인 국화(國花)이다.

무궁화(無窮花)는 ‘무궁한 꽃’이라는 의미로 계속해 피고 지는 꽃이라 할 수 있다.

무궁(無窮)이란 동양사상에서 우주의 시초(始初)이며 본체(本體)를 무극(無極)이라 하는데 무극에서 태극(太極)으로, 태극에서 무극으로의 순환반복을 계속하게 되는 것을 두고 우주운동(宇宙運動)이라 하듯 무궁화의 특성이 바로 이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고조선 이전 환나라 때부터 나라꽃으로 신성시 여겨져
정부수립후 1949년부터 우리나라 상징 꽃으로 공식지정
다섯갈래 잎사귀와 꽃잎, 오행과 일치…태극철학과 부합
꽃 색에 관계없이 가운데 화심은 붉어 음양의 상징 비유

국내 문헌에서 <조대기(朝代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의 기록을 보면 무궁화는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어 왔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 이전에는 환(桓) 나라의 꽃이라 해 환화(桓花)라고 하였으며 신단(神壇) 둘레에 심어져 신성시되기도 했다.

다른 명칭은 목근(木槿), 순영(舜英), 순화(舜華), 훈화초(薰華草),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번리초(藩離草), 천지화(天指花) 등으로 불리어진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의 기록을 보면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무궁화)가 있는 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君子之國有薰華草 朝生夕死)라고 했다. 옛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불리어져왔으며 공자도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해 군자가 거처하는 곳이라 했다.

고대 신라 효공왕 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해 당나라에 보낸 국서(國書) 가운데 신라가 스스로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으며 <구당서(舊唐書)> 신라전(新羅傳)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즉 무궁화의 나라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것은 신라시대에도 우리나라를 무궁화의 나라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역시 중국서적인 고금주(古今註)에도 군자의 나라 지방 천리에 목근화가 많다(君子之國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대목이 나온다. 문헌에 따르면 무궁화는 고대사에서부터 고려조까지 우리나라에서 사랑을 받아왔다.

물론 조선 광해군 때 지봉 이수광이 지은 일종의 백과사전적 저서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군자지국 지방천리 다목근화’(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이씨(李氏)왕조로서 오얏나무를 중시하였으며 궁전 내에는 왕실의 꽃인 이화(李花, 자두꽃)를 소중하게 여겼으므로 상대적으로 무궁화는 밀려나 등한시 됐다. 이후에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한국 민족의 꽃이라는 이유로 아예 전국적으로 무궁화 씨 말리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에 일본은 대안으로 무궁화를 뽑거나 캐낸 자리에 일본 꽃인 벚꽃을 심게 하고 벚꽃을 널리 홍보했다. 또한 우리의 의식 속에서 무궁화는 지저분하고 볼품없는 꽃으로 인식시키고 무궁화를 경멸하고 격하시키는 마음을 심으려고 많은 시도를 했다.

무궁화는 개화기(開化期) 당시 윤치호, 남궁억 등이 민족의 자존(自尊)을 높이고 열강들과의 대등한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 나라꽃으로 무궁화를 결의했다.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라는 구절이 표현돼 있는 것도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는 오랜 인연으로 맺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다.

무궁화가 우리나라에서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공식 지정되었던 것은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1949년부터이다.

무궁화는 동양사상인 천지인 삼재사상(三才思想)과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천지인은 하늘인 시간과 땅인 공간 그리고 사람인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원줄기에서부터 한마디에 세 갈래씩 갈라져 삼재(三才)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상반된 성질이어서 서로 대립적이지만 상보적인 두 가지 기운을 음양이라 하는데, 무궁화는 꽃의 가장자리가 희거나 여타 다른 색상을 띄더라도 가운데가 붉은 화심(花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빛이나 음양의 상징으로 비유되고 있다. 붉은 화심부(花心部)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의미하고 있다.

오행은 음양에서 만물의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을 목화토금수로 나타내는 것으로, 다섯갈래로 나눠진 잎사귀와 다섯장으로 돼있는 꽃잎이 오행(五行)과 일치되고 있다. 이 것은 우리 한민족의 태극철학을 상징하고 그것에 부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민족의 정신을 말하듯 날마다 이른 새벽 태양의 광명과 함께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 오므라들기 시작해 해질 무렵 태양과 함께 떨어진다. 태양과 운명을 같이하는 꽃인 것이다. 매일 새로운 꽃이 피었다 저녁에 지는데,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100여일 동안 꽃을 피운다.

무궁화는 자강불식(自强不息, 스스로 힘을 쓰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아니함)으로 은근과 끈기 그리고 일편단심으로 다져온 오랜 우리의 민족성을 닮고 있다.

민족혼의 표상이면서 무궁화는 항일구국 운동의 투혼이라 해 일제의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일제강점기 무궁화 말살정책으로 오산(五山)학교 학생들과 대구사범 학생들이 궐기에 들어가고 전국 곳곳의 학생들이 비인도적인 야만행위를 규탄했다.(무궁화동산사건)

황성신문의 사장을 지낸 남궁억 선생은 일제 탄압을 견디다 못해 경성을 떠나 강원도 홍천에서 은거하며 낮에는 야학당에서 청년, 학동에게 우리말, 우리역사를 가르쳤고 밤에는 무궁화 묘목을 전국의 학교, 사찰, 교회에 보냈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십자가당 사건 또는 홍천 보리울 무궁화동산사건)

민족의 수난과 함께 무궁화가 핍박당한 사건들은 이 외에도 줄을 이었는데 모두가 애국충정의 결의로 남은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무궁화 사랑은 민족의 정신과 얼을 지키려는 애국행위이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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