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남목마성 제1편- 양마, 근대 이전 국가의 기간산업

▲ 군마도(群馬圖), 국립순천대학교 박물관 소장, 윤두서 作.

여러 고문헌(古文獻)의 기록과 각종 발굴조사 자료를 살펴보면, 말(馬)은 초기 국가시대부터 사용되었고, 삼국시대에는 말의 생산·관리를 위한 마정(馬政, 말 관리 정책)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에 접어들면서부터 마정을 전담하는 사복시(司僕寺, 처음 大僕寺)와 전목사(典牧司)를 중앙에 두고, 지방의 여러 목장에는 수장인 목감(牧監)과 말을 기르고 감시하는 노자(奴子) 및 간수군(看守君)을 배치해 실질적인 양마(養馬)가 가능하도록 했다. 심지어 말과 가축을 효율적으로 사육하는 방법을 정리해 일종의 지침서인 <축마우료식(畜馬牛料式)>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그리고 고려 중기 이후 원나라가 적극 간섭한 시기를 거치면서 마정은 보다 다변화됐다.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기마병을 주력군으로 한 원나라는 당시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고 할 수 있는데, 고려 충렬왕2년(1276) 이후 제주도(당시 탐라도)에 대규모의 몽고식 목장을 만들어 몽고말을 방목한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러한 고려의 마정(馬政, 말 관리 정책)은 조선시대에도 큰 틀에서 연계돼 중요하게 다뤄졌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뒤에 조선을 건국한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말(馬)을 타고 여러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말의 중요성을 각인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말(馬)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버릴게 없다는 말(言)이 있듯이 조선시대에 들어서 군사적 목적을 비롯해 식용과 제품 생산의 재료에 이르기까지 그 수요가 보다 확대돼 기간산업으로 정착됐다.

고려 중기 이후 원나라가 내정에 관여하면서 마정(馬政)의 세분화
조선초 감목관을 지방 수령이 겸하게 했는데 말 생산력 떨어지자
목장마을 수령·군대 수장 뽑을때 말 전문가 뽑아 감목관 겸하기도
목자는 세습·직종변경·이사 등 불가…고된 삶과 전문직이란 증거

조선시대의 마정 전담기구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사복시(司僕寺)였는데, 병조(兵曹)에 소속돼 있었음을 보면, 그 무엇보다 군사적 목적에서 마정이 다뤄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복시의 업무는 말의 호적을 관리하는 기초적인 사무에서부터 심지어 젖소까지 관리하는 등 다양했지만, 그 중 지방의 마성(馬城, 목장성)과 연관해 주목되는 업무로 말의 상태 점검(點馬), 임금용 말 선택(御乘馬擇), 목장관리(牧場管理)등이 있다.

이러한 마정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담당 조직이 세분화되거나 업무가 이관돼 여러 조직으로 분담됐다가 다시 합쳐지는 등 시기적으로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와 국방(관방) 개념의 전환에 따라 정비돼 가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 조선초기 지방의 곳곳에 목장을 설치해 각 도(道)의 관찰사 아래에 감목관(監牧官)을 두고 이를 해당 지역의 수령을 겸하게 했다. 이는 태종 7년(1407) 의정부가 건의해 전국 각지의 말먹일 풀이 풍부한 장소에 목장을 만들고 목자(牧子)가 생산에 종사하되 소속 고을 수령에게 책임을 맡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환경에 예민한 말을 키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수령들의 감목관 겸직은 말 생산의 저하를 초래하기 일쑤였다. 이에 태종 8년(1408)에는 각 목장에 별도의 감목관을 배치했다.

 

그리고 감목관에게 있어서 말의 안위(安危)는 곧 그들의 벼슬길과 직결되는 체제로 짜 두었는데, 기본적으로 각 목장에는 말 번식에 능숙한 6품 이상의 감목관을 파견했다. 구체적으로는 목장마다 1년에 말의 번식 정도에 따라 상·중·하등으로 나누고, 상등으로 3번 평가되면 진급시켜주었다. 하지만 3번 중등에 머물면 여지없이 직급을 내리며, 심지어 하등이면 그 죄를 물어 파직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목장의 수장인 감목관은 그야말로 말 번식에 숙달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감목관이 머무르는 관사(官舍)로부터 목장이 상당 거리 떨어진 바닷가의 굴곡이 심한 곳에 있어 수시로 감독하기 어렵고, 그 구역이 넓어 말을 순찰하는 비용이 많이 들며, 이 비용은 주로 인건비와 관련돼 부역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해당 고을 수령(守令)들과의 업무협조와 직결되기 때문에 고을 수령 또는 여타 관원이 감목관을 겸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이러한 여건과 상황을 바탕으로 목장이 있는 고을 수령 또는 그 인접에 위치한 군대(군영)의 수장을 임명할 때, 말(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자로 감목관을 겸하도록 했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로 세종 22년(1440)에 사복시의 계문에 따라 제주 목사를 감목관과 겸하게 해 제주 마정을 통솔하도록 한 것을 들 수 있으며, 현감(縣監),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비롯해 지방 역(驛)에 근무하는 종9품의 역승(驛丞)이 감목관을 겸하기도 했다.

한편, 각 목장에는 말(馬)과 소(牛)의 실질적인 생산 업무를 담당하는 목자(牧子)들이 종사했다. 목자의 신분은 양인(良人, 평민)이었지만, 그 하는 일(役)이 하도 힘들어 ‘양인 신분에 일은 천민(身良役賤)’이라 했다. 16세에서 60세까지 일에 종사하도록 돼 있었고, 자식에게 세습돼 함부로 터전을 떠날 수도, 다른 직종으로의 변경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이는 목자의 고된 삶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맡은 일이 그 만큼 전문직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오늘날 흔히 목장이라 하면, 청명한 하늘 아래 소나 말이 삼삼오오 모여 한가롭게 풀을 뜯고 특별한 끼니를 주거나 저녁이 되면 축사로 돌아오는 그런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해안에 위치한 목장으로 들어가 보면, 혹시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사나운 짐승이 들어와 말을 잡아가지나 않을까, 어디 무너진 목장 너머로 말이 달아나지는 않을까, 말이 병들어 죽지나 않을까하며 노심초사 하는 목자와 감목관을 먼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군수품으로서의 병마(兵馬), 국가 교통시스템인 역마(驛馬), 농경사회의 주요 장비로서의 가축, 중요 외교상의 교역품, 각종 생필품 생산의 기초 재료 등 어디 하나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는 국가 운영을 위한 필수 생산품으로서의 말(馬)을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말은 생계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이유, 즉 삶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말을 기르는 양마(養馬)는 중요한 산업 중 하나이며, 그것도 근대 이전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에 ‘기간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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