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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기획특집인물로 읽는 울산유사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227)]6대 총선때 14표 차로 낙선, 재검표까지 했지만 판세 못뒤집어‘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7)6대 총선과 김성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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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20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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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영의 부자로 초대 경남도의원을 지냈던 김정린씨는 4대 총선에서 자유당의 김성탁 후보를 밀어 김 후보 당선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와 가까운 집안이었던 그가 해방 직전인 1944년 석남 가족들과 함께 인천 월미도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사진에서 맨 오른편에 앉아 있는 분이 석남의 모친 언양할머니이고 중간에 서 있는 분이 석남의 동생 석해 여사다. 그리고 김씨의 어머니 이애완 여사가 김씨와 여동생 석해 사이에 서 있다.

50년 울산헌정사로 볼 때 김성탁 후보는 가장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만일 정치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보복성 출마를 무리하게 하는 바람에 엄청난 재산을 모두 날리고 나중에는 무위도식하는 신세가 됐다.

1922년 북구 어물동에서 태어났던 그는 4, 5, 6대 연이어 출마했지만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기간은 4대 고작 2년 정도였다. 7대에도 출마했지만 이때는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의 설득으로 자진사퇴했다. 그러나 출마를 접을 때 이 실장이 그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자 8대에는 이 실장이 미는 여당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홧김에 출마해 재산만 날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연탄업계 양대 거부로
4~8대 국회의원 선거에 잇따라 출마
4대 총선때 ‘돈선거’로 당선됐지만
4·19로 2년간의 짧은 정치생활
5·6대에도 출마했지만 잇따라 고배
7대때 이후락 설득으로 중도 사퇴
농림부 장관 자리 약속 안지키자
8대때 홧김에 출마해 재산만 날려


4대 의원 시절만 해도 그는 정해영 후보와 함께 우리나라 연탄업계에서 쌍벽을 이뤘던 거부였다. 그는 풍곡, 성풍탄광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풍국해운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당시 정형근 육군대장의 지프를 타고 울산과 서울을 드나들었다. 서울 집도 해병대 참모총장의 관사를 구입해 초호화판 생활을 했다. 정치인으로 그의 영광은 이것이 끝이었다.

4대 총선 때 그의 먼 친척으로 수행비서로 활동했던 김문경(84) 전 국민대 교수는 “김 후보는 상대방인 정해영 후보처럼 전략적인 선거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매사에 추진력이 있고 화통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당시 선거에서 그를 도왔던 인물로는 초대 경남도의원을 지냈던 김정린씨와 외솔 최현배 선생의 4촌 동생 최현태씨가 있다. 최씨는 하상면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정린씨는 병영 부자로 이 선거에서 북정동 함양집에 선거사무실을 차려 놓고 이곳을 찾아오는 유권자들을 상대로 술밥을 대접하면서 김 후보를 적극 도왔다. 김씨는 석남 송석하와 인척으로 6·25때는 석남의 부인 김경옥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서울에서 병영으로 피난 와 그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또 병영 출신으로 나중에 9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원규씨와 울산을 대표하는 향토사학자 김석보씨도 일선에서 김 후보의 득표활동을 벌였다.

4대 총선에서 자유당 후보로 엄청난 돈을 뿌려 정해영 후보를 이겼던 그는 5대 총선에서 다시 정 후보와 격돌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울산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자유당 시절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4·19가 일어났을 때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예상을 뒤엎고 5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무려 8500여 표를 얻었다. 그가 이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거구호가 유권자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5대 총선에서 그는 “천하 죄인 김성탁이 무릎 끓고 사죄한다”는 팻말을 들고 나타났고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긴 유권자들이 표를 주었다. 당시만 해도 동정표가 힘을 얻을 때였다.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에게 6대 총선은 권토중래의 기회였다. 6대 총선에서 그는 여당인 공화당 공천을 받았다. 당시 울산을 포함한 경남 지역은 유권자들 대부분이 공화당을 지지해 공화당 공천이 바로 당선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는 이 선거에서 민주당의 최영근 후보에게 14표 차로 패해 경남 유일의 공화당 낙선의원이 되고 말았다. 그는 선거결과에 불복해 재검표까지 했지만 판세를 뒤집지 못했다. 대신 재검표에 소요되는 비용을 모두 부담해 엄청난 선거비를 지불해야 했다.

6대 총선에서 그가 공화당 후보가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후락 실장의 도움이 컸다. 공화당은 창당이념을 살려 참신한 인물을 내세우기로 하고 처음에는 이만욱씨를 후보로 선정키로 했다. 이씨는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던 이석호씨 부친으로 성격이 강직해 공화당 창당 이념에 부합했다. 또 지역 유지로 재력이 탄탄했을 뿐 아니라 이 실장과는 같은 학성 이씨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공화당이 선거를 앞두고 후보를 갑자기 김성탁씨로 바꾼 것은 이씨의 강직한 성격이 현실정치에 중점을 두었던 공화당의 선거전략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이석호씨는 “제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부친이 선거를 앞두고 서울에 오셨는데 이후락 실장이 전화로 만나자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이 때 ‘나를 만나려면 자네가 찾아올 일이지 왜 나를 오라고 하느냐’면서 역정을 내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 이처럼 타협을 모르는 아버님의 성격 때문에 후보 선정과정에서 아버님이 탈락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게 됩니다”고 말한다.

자유당 출신 국회의원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았던 김성탁 후보는 자신이 공화당 시대 다시 한 번 국회의원이 되는 길만이 오직 정치적 오점을 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이 선거에 전력 투구했다.

그는 자신이 운영했던 탄광과 해운회사 심지어는 호화 주택까지 은행에 잡힌 후 선거자금을 마련했다. 개표 초반 지지표가 많이 나와 당선을 자신했던 그는 경주 불국사 호텔에서 초저녁 선거운동원들과 함께 당선 축하연을 가졌다. 이 때 김 후보는 경주에서 출마했던 공화당 이협우 후보를 호텔로 불러 오히려 이 후보의 선거를 걱정했다.

그러나 개표 상황은 새벽이 되면서 바뀌어 결국 그는 패하고 말았다.

김 후보의 패인은 자중지란 때문이었다. 당시 김 후보의 핵심 요원으로 선거 일선에서 뛰었던 백암 정창화씨는 자서전 <격랑의 시대를 살다>에서 공화당 내홍을 다음과 같이 그려 놓고 있다.

“공화당 창당 후 처음 치러지는 1963년 선거에서 당원들의 소견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져 어려움을 맞게 됐다. 중앙당이 울산 후보로 김성탁씨를 공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그는 자유당 시절 고무신과 막걸리, 설탕을 돌려 부정선거의 전형적인 인물로 찍혀 있었는데 참신한 인물을 후보로 선정하겠다는 공화당이 그를 후보로 선정하겠다고 하니 당원 모두가 반대했다.

나를 포함한 사무국 전원이 중앙당 공천에 반대하면서 사무국 문을 걸고 출근 거부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국회에서 다수당이 돼야 혁명정신과 창당 이념을 구현할 수 있다고 중앙당에서 주장하는 바람에 더 이상 우리들이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김 후보는 6대 낙선 후 7대에는 공화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홧김에 국민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게 된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설두하씨를 공천했기 때문에 김씨가 사퇴하지 않을 경우 야당인 민주당의 최영근 후보가 당선될 것이 확실시 됐다.

이렇게 되자 이 실장은 김씨를 납치하듯 당시 웅촌에 있었던 자신의 석천 별장으로 불러 중도사퇴를 종용했다. 이 때 이 실장이 사퇴조건으로 그에게 제시한 자리가 농림부 장관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 실장의 제안에 김 후보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확답을 받지 않는 한 사퇴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이 실장은 진해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를 데리고 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김 후보의 요구를 수락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때 국회의원 자리 하나를 놓고 이처럼 박 대통령까지 관심을 쏟은 것은 이 때 이미 박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후 울산으로 돌아온 김 후보는 중도 사퇴를 하게 되고 공화당의 설두하씨를 도와 설씨가 당선된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8대에 다시 김씨가 출마해 당시 공화당의 김원주 후보의 낙선 운동을 벌이는 바람에 야당 초년병인 최형우씨가 당선됐다.

김 후보는 박 대통령과 담판을 벌였던 얘기를 타계 일 년 전 울산으로 와 술회했다. 이 이야기는 7대 총선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7대 총선 후 어렵게 서울에서 살았던 그는 타계 후 고향 강동 땅에 묻혔다.

6대 총선에서 김 후보가 선거사무실로 사용했던 장소는 성남동 큐빅광장 맞은편 사무실이었다. 당시 이 자리에는 정갑윤 국회의원의 형이 해성목재를 차려놓고 2층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했는데 이 건물을 빌려 선거사무실로 이용했다. 이미 50여년의 세월이 지난 이곳은 요즘은 스마트폰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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