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동심초(同心草)

▲ 동심초는 우리나라 가곡 가운데 가장 널리 불려지는 곡 중의 하나다. 사진은 한 성악가가 동심초를 부르고 있는 모습.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배웠던 동심초가 반세기를 넘어 살아온 요즘도 나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문득 바람에 스치는 낙엽 한 장이 귓전을 울리고 있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향기를 품고 숨어있는 사연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다른 가곡도 많지만 유독 동심초만 가슴 깊숙이 들어와 마음을 통째로 흔들곤하였다.

삶과 죽음은 한 몸이듯 남녀 간의 비밀도 하나로 묶인 채 멍든 가슴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아련한 비밀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비밀은 자신만의 은신처이면서 동시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얼마간 스스로를 위로받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동심초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지면에 남긴 것
중국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의 ‘춘망사’ 일부분을
김억 선생이 번역·김성태 선생이 곡을 붙여 탄생
나라와 시대 초월해 한국가곡사에 명곡으로 남아

남녀 간의 연분(緣分)으로 인한 비밀만큼 많은 것을 간직 한 것도 없을 것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문학이나 예술 분야의 주제로서 남녀 간의 사랑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생에서 성공과 행복의 조건으로 돈, 사랑, 명예를 자주 거론하는 것을 듣는다.

이들 세 가지 모두가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나 거의 본능적으로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의 차이는 있다. 분명한 것은 셋 중 어느 것 하나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듯이 한가지에만 충족을 하더라도 인생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동심초에서는 남녀 간의 애틋하고도 지극한 그리움이 묻어있는 ‘사랑’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언뜻 듣기에 따라 동심초는 풀이나 꽃이름 정도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말사전에도 중국말 사전에도 동심초라는 단어는 없다. 대신 ‘동심결’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띠를 두르는 매듭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즉 동심초란 종이는 풀로 만드는 것이며 연서(戀書)를 접는 방식이 바로 돗자리 짜는 풀의 매듭 방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연서, 사랑의 편지, 러브레터 등으로 이해하면 된다. 동심초는 연인(戀人)에 대한 그리움의 자취를 지면에 남긴 것으로 가사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동심초는 중국 당(唐)나라 여류시인인 설도(薛濤, 자는 洪度)의 ‘춘망사’(春望詞)라는 즉 ‘봄을 그리다’는 뜻의 시에서 4수 중 3수에 해당되는 내용만을 김억 선생이 번역하였으며 서울대 음대에 재직 중이셨던 김성태 선생이 곡을 붙여 탄생하였다.

이와 유사한 연유로 탄생된 곡이 하나 더 있는 데 조선중기의 예술가이자 기녀(妓女)인 황진이가 지은 ‘꿈’(相思夢)이라는 한시를 역시 김억 선생이 번역하고 김성태 선생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비록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동심초’와 ‘꿈’은 설도와 견줄만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여성으로 황진이의 한시를 동일인이 번역하고 동일인이 곡을 붙였다는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설도와 황진이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님에 대한 현실적 한계에 심적 그리움을 애잔한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당(唐)나라 출신의 시인인 설도의 흔적은 중국의 성도(成都)에 있는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에 설도의 묘를 비롯하여 조각상과 기념관 등이 있다.

그녀는 직접 종이에 붉은 물을 들여 그 위에 시 쓰기를 좋아했는데 이 것을 설도전(薛濤箋, 작은 종이라는 뜻)이라 하였다. 공원에서는 설도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렀던 설도정(薛濤井)과 설도전을 만들었던 장소인 완전정(浣箋井), 그리고 시를 지어 설도전에 옮겼다는 음시루(吟詩樓)가 있으며 시에 자주 등장하는 대나무 숲도 함께하고 있다.

설도는 태생이 장안(長安)이었으나 어려서 하층관리였던 부친을 따라 촉(蜀)나라 성도로 왔다.

촉으로 온지 얼마 안 되어 부친은 죽고 홀어머니만 남았지만 모친 역시 곧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현실적 어려움으로 설도는 악적<樂籍, 악공(樂工)의 등록 원부>에 들어 악기(樂妓, 기예를 파는 기녀)가 되었다.

선천적으로 재주가 비범하였던 설도는 음률에 능통하였으며 문학에 재능이 뛰어나 시가(詩歌)를 잘 지어 인정을 받았으며 당대 최고의 문인인 위고, 원진, 백거이, 두목, 유우석 등과 교류하며 창화(唱和)를 나누었다.

당시에는 문학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명망있는 인물의 후원이 필요했는데 천서절도사(川西節度使) 위고(韋皐)가 설도의 후원을 맡게 되었고 후에 그는 그녀를 황제에게 주청하여 교서랑(校書郞, 벼슬명)에 제수(除授)하려고 하였지만 호군(護軍)의 저지로 뜻을 이루진 못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그녀를 설교서(薛校書) 혹은 여교서(女校書)라고 불렀다.

설도가 부부의 연을 꿈꾸었던 사람은 당나라 시인이자 사천감찰어사였던 원진으로 알려져 있다.

성도에서 그녀와 시간을 보냈던 10살 연하인 원진에게 연정을 느꼈지만(후에 원진은 약속을 어기고 위(韋)씨와 결혼했다는 설과 그가 이미 아내가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바람기가 많은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설도의 사랑은 미완(未完)으로 남게 되었다.

<춘망사(春望詞)>는 설도가 원진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로 전해지고 있다. 설도는 원진과의 정분(情分)이 있은 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이렇게 많은 사연을 안고 태어난 동심초는 나라와 시대를 초월하여 이제 한국 가곡사의 명곡으로 남게되었다.

세월은 어둠이 잠든 사이 몰래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몸을 엎드리며 사라져간다.

떠나간 사람도 침묵으로 어두워져 간다. 사랑은 어둠속에서 왔다가 어둠속으로 가버린다.

사랑이 떠난 자리엔 그리워 해야 할 시간만이 남아 있다. 그리움 뒤에는 기약없는 기다림이 시작되고 대답없는 기다림은 나그네의 한숨이 된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청춘과 아지랑이 같은 추억을 더듬을 때면 늘 이별 같은 가곡 하나 동심초가 떠오른다.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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