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자료 없는 역사추정은 금물
잘못 복원된 역사는 가치 상실

 

지역사는 어느 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만인의 공유물이다. 그러한 공유물의 자료를 자신의 편견만으로 맘대로 공식화해 인쇄물로 남기는 것은 여러 연구자들과 후학들을 우롱하는 올바르지 못한 행위이다. 모든게 검증된 자료로서만 표기되어야 하며, 추정은 금물(禁物)임을 전제(前提)해야 한다. 이는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에 세거하는 세칭 명촌김씨로 일컫는 계림김씨 부사공파의 입향조인 김자간(金自幹)공에 관련된 자료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의 족보 자료에 의하면 그냥 ‘현감’으로만 되어 있을 뿐이지 언양현감이라는 낱말은 없어 보인다. 그의 가장(家狀)과 후손(휘 善立)의 묘갈명에도 그냥 현감으로만 기록돼 있다. 언양읍지인 <헌산지>의 ‘현선생안’에서도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상북면지(2002)>의 464쪽에는 언양현감 겸 경주진관 병마절제도위로, 울주군의 ‘희망마을만들기 마을공동체사업’의 연구용역보고서인 <마을조사보고서(2016)>의 358쪽에도 ‘(상략)…입향조 언양 현감공(縣監公) 자간(自幹)의…’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대한 후손들의 증언은 “그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어느 지역인지는 몰라도 단지 ‘현감’을 지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는 언양현감을 역임한 인물로 고착화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고증 과정을 거쳐 ‘현선생안’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렇게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다 울산의 연혁에 대한 정체성과 역사성도 혼란을 주는데 한 몫하고 있다. 울산의 옛 이름 학성이란 별호를 얻은 시기도 울산광역시에서 발행한 <울산의 문화재(2016)>안내 책자에는 고려 성종 14년(995)으로 돼 있다. 일각에선 흥려부에서 공화현으로 격하되는 고려 성종 10년(991, 신묘, 순화 2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대한제국 관보(1906.9.28)의 칙령 제49호(1906.9.24)에 의거한 지방구역 정리 때 경주군에서 편입된 외남면을 울산군 두북면으로 개칭, 얼마 뒤 국도 제35호선(반구대로)을 경계로 지금의 두동면과 두서면으로 분면(分面)하였다. 그 시기를 두고 아직까지도 정확한 연도를 정립하지 못하고 문헌과 필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필자는 1927년 7월에 준공된 구병영교(일명 산전교) 역시 언론은 물론이며 울산광역시의 위 자료집에서조차 1957년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문화재 지정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경상일보, 2016.10.28). 이 외에도 경상좌수영의 울산 개운포에서 부산 해운포로의 이설시기와 방어진면의 읍 승격시기도 맘대로 만들어서 발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지난 19일 복원·준공된 서생포왜성 내 창표사(蒼表祠)에 모셔진 신위(神位)의 실체에 대한 진위여부도 새로운 문제점으로 등장했다. 이는 고증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관계 기관에서 쇠귀에 경 읽기식으로 간과해 버렸다. 지난 4월에 경상일보에서 두 번이나 지적 보도를 했는데도 말이다. 그야말로 진짜 위패(位牌)가 아닌 가짜팻말(僞牌)을 모신 창표사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복원의 취지와 가치가 완전 상실되었다고 본다. 관광명소가 될지는 몰라도 후세 청소년들의 산교육장이 되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가짜팻말을 모셔 놓고 어찌 산교육장으로 활용한단 말인가? 같이 모셔진 진짜 공신들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이런 것 때문에 시사편찬위원회의 상설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경상일보를 비롯한 지역의 몇몇 언론에서 수차례 상설화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나 울산시에서는 그 어떠한 변화의 조짐도 없었다. 현재 ‘디지털울산문화대전’을 만들고 있으니 이 사업이 끝나는 시점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몇 가지 사항들을 포함한 여러 문제점들이 올바르게 정리되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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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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