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제사로 들른 고향은 예전같지 않아
현대사회 조상에 대한 인식 희석됐지만
친척간 유대와 뿌리 찾기는 지켜졌으면

▲ 김동영 울산시민자유학교 교장

지난 일요일 아침에 고향인 언양의 직동리 선산을 찾았다. 거기엔 입향조인 7대조의 묘소가 있다. 음력으로 시월은 상달이라고 하며 모두들 조상 산소에서 묘제를 지낸다.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배고팠던 시절에 해마다 묘제 때가 되면 우리는 더없이 좋았다. 맛있는 시루떡과 절편을 많이 얻어먹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흰 두루마기 입은 어른들이 보이는 이산 저산을 찾아 다녔었던 그때의 허기진 아이들은 묘제 지내는 철이 되면 너나없이 신이 났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예순이 넘어서 7대조의 묘제에 참예를 하니 아저씨뻘은 한 분도 안 계시고 조카뻘 종손이 벌써 나이가 일흔이다. 그런데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사촌형님들도 건강상 못 오셨다고 한다. 그 조카들도 함께 안 보인다. 풍속도 세월 따라 많이 바뀌었다. 장례문화가 달라진 것도 이유일 것이고 조상에 대한 인식도 많이 희석이 되어 가는 듯하다.

묘제(墓祭)를 마치고 문중의 일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에선 다들 앞으로의 일을 걱정한다. 선산을 지키는 못난 고향지기들만 벌초나 묘제를 담당하고, 잘나서 출세하여 고향 떠난 이는 점차로 왕래가 없어지고, 이러다가 우리 대(代)가 지나면 조상이나 문중은 잊게 될 것이라고 누군가가 열을 올리고 또 대안이 없음에 한탄한다. 묘제나 문중일이 구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면 더러 생략도 하고 의논을 해서 바꾸어 가는 것이 현명하고 바른 선택이고 지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할아버지 형제의 자손들을 만나 본 적도 없고, 그리고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 삭막하지 않은가. 요즘 아이들은 이종간, 외종간은 친한데 친사촌간은 잘 모른다고도 한다. 친인척의 인연을 끊고 살면서도 남들과는 이웃이니 학연이니 집착하는 이중적인 인간관계를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형제나 가까운 친척간의 큰 일 만이라도 왕래하는 것이 기본적인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국어사전에 ‘문중’이란 4대인 고조의 자손, ‘종중’은 그 이상이라고 되어 있다.

언젠가는 묘제가 없어질 날이 올 것이고 장례문화도 많이 바뀔 것이 뻔하다. 자식들이 그래도 설·추석에 성묘를 같이 하면서 현재까지 우리를 있게 한 조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잠시나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 아직도 옛날의 구태의연한 유교의 잔재에 깊게 빠져있는 무지한 민족성이라고 헐뜯는 일부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유교를 무조건 현대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구시대 산물로만 여기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편견이다. 사람으로서 덕과 인성을 닦고 기르는 중요한 덕목이고 황금률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단지 뿌리를 찾는 고아의 심정으로 조상의 묘를 찾는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손들의 얼굴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다소의 안정감을 얻는다.

공자가 ‘仁者(인자)는 人也(인야)니 親親(친친)이 偉大(위대)’하다고 했다. ‘仁(인)은 사람의 몸이니 어버이와 친척을 친히 하는 것이 큰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풀이를 하자면 효를 바탕으로 하고 그 다음 형제자매와 친척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것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본래 9남매지만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지내지 못하고 외가에서 보냈었고 방학 때에만 형제들과 생활을 했었다. 때문에 늘 고향 집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다. 고모나 아재들, 그리고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정도 못 받고 자랐었다. 주위의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이 평생에 걸쳐 인성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늘 함께하는 형제들이 부러웠다. 아이만큼은 문중의 일들을 함께 하여 팔촌까지라도 나누며 살아가게 하고 싶은 애비 심정이다.

김동영 울산시민자유학교 교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