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남목마성 제2편- 조선시대 목장에 대한 이해

▲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 보물 제1595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울산에 위치한 남목마성은 말(語) 그대로 말(馬)을 기르던 성(城)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니, 보다 포괄적인 목장(牧場)의 개념은 가려진 경우가 더러 있다. 조선시대 목장은 고려시대의 것을 수리하거나 개조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조사관을 파견하여 수초가 좋은 곳에 새롭게 설치하는 등 국영 또는 개인이 운영하는 다양한 목장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장 안에서 말(馬)은 물론이고 소(牛)·양·돼지·염소(羔)를 비롯하여 요즘 들어 야생동물로 분류되는 노루(獐)와 고라니(麂)까지 기르기도 했다. 따라서 목장의 주종 가축에 따라 말목장(馬牧場)·소목장(牛牧場)·양목장(羊牧場)·저장(猪場, 돼지목장) 등등 유형도 세분화되었다.

하지만, 이 중 말목장이 가장 많았고, 기타 가축을 기르던 목장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지방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남목마성으로 대표되는 방어진목장도 말을 주종으로 사육하였다. 여러 고문헌을 고찰해 볼 때, 현재까지는 남목마성에서 말을 제외한 다른 가축을 길렀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말목장성으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지만, 울산 관내에 경상좌병영을 비롯한 여러 관방시설인 군영(軍營)이 위치하였음을 염두에 두고 그 수요를 감안하면, 일정 수(數)의 소가 사육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도 어렵다. 참고로 소의 사육은 소만을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목장과 말목장에 소속된 것의 두 종류가 있었다.

남목마성의 대표 방어진목장
말 주종으로 길렀으나
인근 군영 있어 소 사육 가능성도

바다로 둘러싸인 ‘섬·곶’
자연적 울타리 역할로 목장 발달
전라도에 우마목장 많은 이유

목장섬 제주도, 최상품의 말 생산
섬안에 목장수도 64개로 늘어나
숙종 4년 목자수 전국의 25% 달해

조선시대의 말목장(소목장 포함)은 내륙에 설치된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또는 육지 끝의 바다를 향해 뾰족하게 내민 지형의 곶(串)에 설치되었는데, 이를 보면 바다가 가축들에게 자연적인 울타리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관리의 효율성을 꾀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우마(牛馬) 목장의 관리와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할 때, 그것을 가장 잘 충족시켜 주는 곳은 섬과 곶이 발달한 남해(南海)와 서해(西海)로 이어지는 지역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우마(牛馬) 목장은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을 거치면서, 남해상 및 그와 접한 곳의 대부분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관리의 한계를 보여 주었고, 임진왜란 이전의 기마병(騎馬兵)에 의존하였던 전법(戰法)이 이후 조총병을 포함한 보병(步兵) 체제로 재편되면서 말과 그것을 기르던 목장성의 효용성은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선조 27년(1594) 40여 곳의 목장이 폐지되는 것을 시작으로 인조 19년(1641)에는 119개의 목장 중 말이 있는 곳은 46곳에 불과하였다. 숙종 때는 다소 정비되기는 하였으나, 138개 중 폐지하거나 개간하여 둔전(屯田)·민전(民田)으로 변화한 곳이 62곳에 달하는 등 점차 말의 사육은 감소세를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서 목장의 설치와 운영은 큰 변화 없이 이어지다가 1895년 조선시대 제도개혁과 더불어 목장 또한 점차 혁파되었고,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목장전(牧場田)이 국유지로 몰수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목장 기능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준마(駿馬) 생산지로 이름난 곳으로는 제주도를 비롯하여 함경도 함흥의 도련포(都連浦), 평안도 철산의 대곶(大串), 경기도 강화의 진강장(鎭江場), 경상도 동래의 절영도(絶影島, 현재 영도) 및 울산의 방어진 목장 등이 있다. 그 중 함흥의 도련포 목장에서는 신마(神馬)라 할 만큼 날래고 용감한 말이 많이 났는데, 이성계가 그 말을 타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하여 더욱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이 목장은 넓은 들 가운데 있어 해마다 홍수 때에 목책이 유실되어 관리의 한계를 보였고, 숙종 때 그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 하였으나, 뾰족한 대책 없이 유지되다가 영조 이후 쇠퇴해 가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목장의 입지에 있어 유지·관리의 효율성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섬이나 곶을 선호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제주도 목장은 원(元) 간섭기에 몽골식으로 조성된 이후 중국의 여러 왕조도 탐낼 만큼 최상품의 말이 생산되었다. 제주도는 섬 전체가 목장화된 그야말로 목장 섬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섬 안에 15개의 목장이 설치되었다가 뒤에는 64개로 늘었다. 숙종 4년(1678) 제주도의 목자(牧子) 수(數)가 전국 목자 수의 25%에 달한 것을 보면, 명실공이 우리나라 목장의 대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의 이와 같은 특수성 때문에 정3품의 제주목사는 제주목도안무사지감사(濟州牧都安撫使知監事)를 겸하였고, 그 아래에 감목관을 두어 제주목의 판관과 대정 및 정의현의 현감이 이를 겸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여타의 지방관이 무관직을 겸하는 경우가 있었다면, 제주도는 양마(養馬) 업무와 겸하도록 하여 지방행정 못지않게 말의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명마가 생산될 수 있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목장에서 생산된 말은 혈통·털빛·크기·나이 등으로 분류되었는데 문헌상 그 이름이 약 90여 종에 이르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본래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고유의 말은 고구려·예(濊) 등에서 생산된 과하마(果下馬)였다. 이 말은 성체(成體)의 경우 발끝에서 등까지의 높이가 3척(尺)에 불과하여 말을 탄 채 과일나무 아래로 지날 수 있다는 것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산지(山地)가 많은 우리나라에 최적화된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삼국·고려시대를 거치는 동안 점차 북방지역의 말(중국·서역·몽고말)이 전래되어 다양한 말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말(馬)은 친숙하고 알려진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성(馬城)의 입장에서 볼 때 마다 자꾸 말(語)이 많아진다. 왜냐하면, 말목장과 그것을 성(城)의 형태로 쌓은 마성(馬城)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뛰어다니던 말(馬)과 목장으로서의 성격을 파악해야만 비로소 여타 성곽(城郭)과는 다른 눈으로 마성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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