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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그림이 있는 에세이
[그림이 있는 에세이]내원에 들다 - 엄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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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1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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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정영혜 作. 72.7x60.6(20F)

Oil on canvas.

가을은 겨울이 올까 두려워 아름다운 자기만의 색으로 한껏 뽐을 냅니다.

가을 햇살이 깊어가는 11월 둘째 주말, 가까운 지인들과 부부동반 나들이로 내원을 찾았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1천명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기 위해 내원사와 89개의 암자를 지었다는 천성산은 산세가 빼어나고 계곡이 깊어 사계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30여 년 전에는 덜컹대는 시외버스를 타고 와서 친구들과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찰방찰방 물놀이를 하기도 했고 데이트 코스로도 자주 찾아 푸릇한 추억이 가득한 내원사 계곡. 예전과는 달리 잘 포장된 계곡 길을 쉬엄쉬엄 오르며 우리는 늦가을 정취에 흠씬 취했다. 초록으로 무성한 여름을 보낸 나무들은 곱게 물든 단풍잎을 상큼한 바람에 흩뿌려주며 환영인사를 보냈다. 우리는 핸드폰을 꺼내 그 풍경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어릴 적 소풍날처럼 싸가지고 온 김밥과 간식을 계곡 옆에서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산길을 오르다가 문득 공원 한 켠에 세워놓은 바위에 눈이 갔다. 거기에 새겨진 문구를 읽다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내면에 깨어있지 못함이 무지이다.’

나의 내면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언제였나? 아쉬움과 후회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밀려들어 갑자기 마음이 서늘해 졌다. 한해의 마지막을 앞둔 11월에 마주한 나의 내면. 굳게 닫혀있던 그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황량하기 그지없다.

지인들과 부부동반으로 찾은 내원사
‘내면에 깨어있지 못함이 무지’
바위에 새겨진 경구에 정신 번쩍
이제는 무거운 짐 하나씩 내려놓고
내면에 귀 기울이는 여유 찾아야


연이은 불황과 구조조정의 칼바람은 더 이상 남편들의 정년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 30여 년 동안 한 직장에서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 왔던 남편들은 미처 준비가 덜 된 은퇴를 맞아 당황해 했고 가족들 역시 마음을 가다듬기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지난 여름이었다. 2016년 첫해를 보며 가졌던 소망과 다짐들을 되새겨 볼 여유도 없이 맞이한 은퇴는 마음속에 불안과 초조를 가져와 주위를 돌아볼 여유조차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유래 없는 더위와 무섭게 휘몰아친 태풍 차바를 견뎌낸 자연은 곳곳에 할퀸 자국이 남아있지만 다시 되살아나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달래주고 있지 않은가. 계곡을 흐르는 물들은 더없이 청량했고 나무들은 고운 단풍잎을 환하게 매달아 우리의 마음에 안식을 선물한다.

낯선 풍경인 듯 가을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는 남편과 지인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 보다가 우리도 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잎들을 무성히 키워 온 나무들처럼 우리도 많은 것을 키워냈다. 남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경제를 키웠고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고스란히 일과 가족에게 반납했던 그들이 다시 찾은 은퇴 후의 시간. 그것은 제 2의 인생을 설계할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바위와 나무, 계곡의 물길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척박한 바위에 뿌리를 내린 굽은 소나무는 한 줌의 흙조차도 얼마나 소중할까? 곧 마주할 노후가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한 것도 어쩌면 나의 욕심 때문일지 모른다. 올라온 길은 돌부리를 조심하며 타박타박 다시 내려가면 될 터이다. 그동안 누려온 물질적 풍요도 조금씩 줄여 가면 될 것이고 양 어깨 가득 짊어지고 온 무거운 짐들도 하나씩 풀어놓고 정리해 보면 가벼워지리라.

내원사 앞마당은 정갈하고 고요했다. 우리도 잠시 복잡한 상념에서 벗어나 그 여유를 즐겼다. 하산하며 바라보는 산의 뒷 풍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시인의 시처럼 가을 나들이에 들떠서 올라가느라 보지 못한 풍경들이 새롭게 펼쳐진다, 사선으로 비낀 저물녘 햇살 아래 산국이 노란 등불을 켜고 있고 더욱 짙어진 단풍의 고운 색깔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만히 깃들었다.

맛난 식사를 나눌 때조차도 회사 걱정에 토론하듯 사무적이던 남편들이 이제는 온전히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배낭여행을 계획하기도 하고 요리를 배워 아내에게 밥을 차려주고 싶다는 가열찬 포부도 내비친다. 다른 한 쌍은 제주도 올레 일주 일정을 잡는다. 서로 바빠서 마음만 나누던 친구를 만날 생각에 설레고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날 수 없는 아들 딸들을 찾아가 맛있는 것도 먹이고 어깨도 툭툭 쳐주며 격려해야겠다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이제는 무거운 짐을 하나씩 내려놓고 각자의 내면에 귀 기울여 봐도 괜찮은 시간이리라. 우리는 그동안 굳게 닫아둔 내면을 깨워 무지에서 벗어나리라 다짐하며 한결 가벼워진 발길로 내원을 벗어났다.

   
▲ 정영혜씨

■ 정영혜씨는
·지감의법칙전(울산문화예술회관)
·한국신표현울산그룹전(영상갤러리)
·남부현대미술제(울산포천)
·울산사생회전(울산문화예술회관)
·울산사생회·한국신표현작가그룹 회원,
·동그라미어린이집 원장

 

 

 

   
▲ 엄하경(엄미경)씨

■ 엄하경(엄미경)씨는
·시인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한국작가회의 회원
·울산작가회의 회원

경상일보, KS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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