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9)6대 총선과 최영근의원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영남대책 본부장이었던 최영근씨(왼편)가 김대중 후보와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고 있다.

최영근(崔泳謹)의원의 호 ‘우송(友松)’은 그의 민주당 선배였던 정헌주 의원이 ‘소나무처럼 늘 푸르고 정직하게 살아라’는 뜻으로 붙여주었는데 그는 호처럼 평생 정직하게 살다가 타계했다.

우송은 울산에서 5대와 6대 등 두 번 국회의원을 지낸 후 13대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평민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했다.

두동면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국회의원·정부 요직서 일했지만
욕심 없어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

5·6·13대 총선 국회의원에 당선
박정희 대통령도 그의 정직함에
공화당 출마 권유했지만 ‘거절’

오늘날 많은 울산 사람들은 우송과 요산(樂山) 김재호(金在湖) 박사를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로 손꼽는다.

우송이 이처럼 존경을 받는 것은 정치인이 유혹을 받기 쉬운 돈을 몰랐기 때문이다.

1921년생인 우송은 울주군에서도 오지인 두동면 삼정리 잠방골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부친 현범씨가 천석꾼이었기 때문에 요즘말로 하면 그는 금수저 출신이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두동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 보성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돼 망국민의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징집 후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제의 총받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물금에서 왜병의 눈을 피해 기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와 부모들의 도움으로 집 뒤 산에 숨어 지냈다.

당시 왜경이 우송의 집으로 자주 와 온 집을 뒤지면서 가족들에게 우송을 찾아낼 것을 협박했으니 산에 숨었던 우송도 고생했지만 가족들 역시 얼마나 고통이 심했나 하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산속 생활 일 년 후 해방이 되는 바람에 천신만고 끝에 살아날 수 있었다.

해방 후 서울로 가 경성전문대에서 법률을 전공했으나 6·25가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와 1952년 초대 경남도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었다.

도의원 때는 내무위원장을 지내면서 송곳 같은 질의를 많이 해 야당 정치인의 면모를 보였다. 도의원 생활을 바탕으로 4대 총선 때는 국회의원의 꿈을 안고 자유당의 안덕기 후보와 경쟁을 벌였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그는 3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자유당의 압력으로 중도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오위영씨를 이어 울산군 갑구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5대 총선에서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불었던 민주당 바람과 무관치 않다. 5대 총선은 4·19 후 치러졌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민주당 후보가 많이 당선되었다. 그는 4대 총선 낙선 후 재야 활동을 하면서 지역민들로부터 인심을 많이 얻었는데 이 역시 당선에 도움이 되었다.

그의 부친 현범씨는 천석꾼이었지만 재산을 모으는 동안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색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우송은 부친과 달리 욕심이 없었다. 농지개혁 때 지주들 중에는 소작인들에게 논을 무상으로 넘겨주지 않고 몰래 임대료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송은 부친이 이런 형식으로 임대해 준 전답을 나중에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넘겨줌으로써 주위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5대와 6대 우송의 보좌관으로 지낸 후 우송이 제일생명 사장으로 갈 때 함께 가 비서실장을 지냈던 박임근(83·서울거주)씨의 증언이다.

“제가 오랫동안 우송 선생님을 모시면서 느낀 것인데 선생님의 강점이자 약점이 돈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정치를 하려면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한데 선생님은 부자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돈을 몰랐습니다. 선거 때가 되어 제가 선생님에게 돈 얘기를 하면 ‘우리가 언제 돈 가지고 선거했느냐’면서 돈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박씨의 얘기는 계속된다.

“선생님이 정치를 그만두고 제일생명 사장으로 있을 때는 철도청과 우체국 등 정부 산하 국영기업체들이 보험을 많이 들어 회사 경영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이 생각만 있다면 월급쟁이 사장이 아니고 오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위해 선생님이 오너가 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내가 제일생명 사장을 평생 할 것도 아닌데 월급쟁이 사장이면 어떻고 오너면 어떠냐’면서 저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이 때 저는 사장실을 나오면서 이것이 부자 자식으로 산 선생님의 한계구나 생각하면서 아쉬워했습니다.”

우송의 이런 성격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보좌관들과 직원들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송은 5대 총선에 당선된 뒤에도 청량리 전농동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이 때 그는 초선의원이었지만 정무차관을 지내 얼마든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대 국회는 내각책임제가 되어 국회의원의 권한이 막강했다. 특히 우송은 그때 보사부 정무차관 직에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가 정무차관 직에 있을 때는 김판술 보사부장관이 와병으로 업무를 보지 못해 그가 장관 업무를 대신했다.

우송의 정직함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다.

5·16후 우송을 비롯한 민주당 국무위원들이 한동안 마포교도소에 수감된 적이 있다. 이 때 우송은 혁명검찰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당시 혁명정부는 초선의원이었던 우송이 정무차관이 된 이면에는 돈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했지만 돈 거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송이 나중에 정치적으로 애증을 갖게 되는 우석(又石) 이후락(李厚洛)을 처음 만났던 곳도 이곳 마포교도소였다. 당시 우석은 민주당 정보책임자로 역시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다. 우석은 우송에 비해 빨리 출감했다.

이 때만해도 둘의 관계는 좋았다. 우석은 출옥 다음날 우송의 박임근 비서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내가 옥중생활을 하면서 보니 우송이 위장병이 재발해 고생하고 있었는데 내일이라도 위장약을 갖고 면회를 가라”고 지시했다.

우송이 6대 총선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우송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리고는 울산이 정부가 추진하는 공업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당 국회의원이 나와야 된다면서 그에게 공화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한 시간 동안 지속된 이 면담에서 우송은 그동안 자신을 키워준 민주당의 오위영과 박순천, 곽상훈 의원들을 배신할 수 없다면서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앞서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박 대통령은 5·16 혁명 이념을 지지하는 인물이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화당 공천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 때 조선일보 이태규 기자가 박 대통령에게 야당 정치인 중 공화당 후보로 천거하고 싶은 인물을 묻자 박 대통령은 서슴없이 ‘우송’이라고 답했다.

박 대통령이 우송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그가 정직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5·16후에도 우송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5·16후 국회해산으로 부산으로 내러왔던 우송은 전포동에 역시 셋방을 얻어 놓고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이 때 그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김성근과 손정록씨 등 고향출신 사람들이었다.

김씨는 두동초등학교 동기로 당시 부산 영도에서 창고업을 해 부자로 살았고 손씨는 두서 출신으로 자갈치에서 건어물 장사를 해 돈을 많이 벌었다. 우송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 시내에서 이들을 만나 시국담을 애기하면서 무료함을 달래었다.

이처럼 셋방살이였지만 전포동 집은 5대 총선에서 그를 도왔던 울산 선거운동원들로 항상 붐볐다.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는 권기술씨가 이 때 가정교사로 이 집에 머물렀고 정갑윤 국회의원도 이 후 경남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가정교사로 이 집에 머물면서 식솔로 얹혀살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나중에 납치사건으로 악연을 맺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으로 이후락씨에게 소개한 사람도 우송이었다. 우송과 우석은 마포 교도소에서 생활을 할 때만 해도 동향으로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7대 총선에서는 우석이 우송을 낙선시키는데 앞장서게 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7대 총선에서 자세히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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