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몇주째 촛불집회
낭설·가담항설·유언비어 난무
난세를 이끌 선비가 필요한때

▲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세월의 흐름은 어김이 없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다. 아침이 지나면 낮이 오고, 밤이 오듯, 병신년이 지나고 또 새해 정유년이 오고 있다.

새로움은 항상 신선하고 기대감을 준다. 설령 연말이 되어 그 기대가 무너진다 하더라도, 맞는 그 순간만은 항상 그러하다. 이 변함없는 자연의 질서처럼 인간은 누구나 한결같은 마음, 마르나 궂으나 변함없는 올곧은 마음을 타고 났다. 이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가난해도 넉넉해도 변치 않는 마음 그것이 항심(恒心)이다. 이것을 선비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올곧은 선비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사악하고 음흉한 마음도 지니고 있다.

얼마 전이다. 경찰 아저씨가 주변의 업체로부터 기여금을 강요하다가 구속된 기사가 신문에 났다. 더러 있는 일이라 무심히 흘려 보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경찰 아저씨가 나라로부터 선행 표창을 받은 민중의 지팡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십여 년에 걸쳐 주변의 불우 노인을 돕고 잔치를 열어 그들을 위로해 온 선행 경찰이었다. 남의 등을 친 사악한 그와 남을 위해 희생한 그가 그의 마음 속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 할 것인가.

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우선,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내 마음 속에도 이 양면성은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가.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행동들이 모두 선하기만 한 것인가. 과연 누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여느 때와 다르게 올해의 세모는 일찍 춥고 더욱 을씨년스럽다. 자연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가 모여 사는 사회를 인간들이 그렇게 만든 탓이다. 벌써 몇 주에 걸쳐 거리에는 나 아닌 남만 탓하는 전국적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알 수 없는 낭설, 가담항설,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모두가 지도자의 무능을 탓하고, 올바른 통치 철학의 결여를 지적한다.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자세도 도를 넘고 있다. 지도자나 언론이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고, 국민 정서와 민주주의에 어깃장나는 모습들만 드러내고 있다.

영탈(穎脫)이라는 말이 있다. 영은 뽀족한 송곳 끝을 말한다. 탈은 벗어져 나옴을 뜻한다. 그러니 영탈은 송곳을 주머니에 넣으면 그 끝이 삐져 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이 영탈이다. 흔히 뛰어난 인재를 칭할 때 쓰는 말이다. 요즘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가 나왔으면 싶다.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같은 신선한 선비의 모습이 그립다.

선비란 학덕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학식만 있어도 부족하고 덕만 있어도 부족하다. 이 둘이 균형지게 겸비될 때 선비라는 의미에 걸맞다. 선비는 한자로 士로 쓴다. 글자의 모양이 十에다 一을 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비는 열 명 중 하나가 나올까 말까하다고 했다. 누구나 선비가 되지 못한다. 천질의 바탕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 선비 士를 다르게 해석하여 一에다가 十이 더해진 모습으로 풀기도 한다. 一은 시작이고 十은 완성이다. 一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불완전하고 미완성이고 부족함이다. 이로 시작하여 점점 성숙되어 十 곧 완성에 이른다. 덕이 쌓여 이루어지는 인격도 그렇고 배움이 시작되어 완성에 이르는 학식도 그렇게 성숙된다. 선비란 이처럼 학문과 덕망이 완성된 사람이다. 오늘의 난세를 이끌 선비가 그립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도 선비를 다음처럼 정의하고 있다. ‘천하의 공변된 언론을 사론(士論)이라 하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하며, 온 세상의 의로운 주장을 펴는 것을 사기(士氣)라 하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하며, 학문과 도리를 강론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 한다.’ 이를 두루 갖춘 선비여, 지도자여, 나서 주소서.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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