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해파랑길을 걷다

▲ 해파랑길은 동해안의 상징인 해와 함께 걷는 ‘사색의 길’이다. 동구 주전에서 북구 신명에 이르는 해파랑길 울산구간에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까만 자갈이 청정해변을 뒤덮고 있다. 울산 북구 제공

“방에서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없듯이, 사람이란 길을 밟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 일찍이 수레를 타고 세상을 철환주유(撤還周遊)했던 공자가 했던 말이다. 공자는 14년 동안이나 길을 밟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길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2500여 년 전 공자가 걸었던 그 길은 아니지만 세상에 현존하는 수많은 길 가운데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 ‘해파랑길’로 길을 떠나본다. 겨울 찬바람 속일지언정 옷섶만을 단단히 한 채 훌쩍 바닷길로 나섰다. ‘길이 먼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의지가 짧은 것을 두려워하라’는 명언을 되새기며….

이기대서 출발해 숲길·해변도로 등 지나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이르는 해파랑길
간절곶·진하해수욕장·명선도·태화루 등
울산 통과하는 구간은 신명해변서 끝나
동해 눈앞에 두고 해와 함께 길 걷다보면
겨울바다는 새 희망의 공간으로 다가와

해파랑길은 동해안의 상징인 해와 함께 걷는 ‘사색의 길’로 총길이가 770㎞에 이른다. 부산 오륙도를 눈앞에 두고 시작되는 이 길은 이기대(二妓臺)에서 출발해 해변길, 숲길, 마을길, 해안도로 등을 따라 최북단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까지 이른다. 총 10개 구간 50개 코스로 이뤄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트레일 길이다. ‘해파랑’의 어원은 문화관광부의 공모로 정해졌다. 동해 일출의 ‘해’, 푸른 바다의 ‘파랑’, 함께한다는 ‘랑’의 합성어.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보며 함께 걷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 ‘울산판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한 명선도.

부산에서 출발한 해파랑길은 ‘해파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대로 해맑고 청정한 얼굴을 하고 해운대를 거쳐 송정을 지나 임랑해변을 경유해 울산으로 올라온다. 울산에서는 5월의 청년 같은 얼굴을 한 해파랑길을 간절곶이 싱그럽게 맞이하는데 그 모습이 퍽이나 청정해 보인다. 바라보기만 해도 그냥 파란물이 들 것 같은 푸르른 바다. 간절곶의 바다는 몇 번을 봐도 늘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해파랑길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숲과 마을과 사람들은 모두가 낯설지 않은 모습들을 하고 있어 정겹기까지 하다.

▲ 북구 강동동 정자항 해돋이 장면. 울산 북구 제공

간절욱조조반도(艮絶旭肇早半島). 울산 간절곶에 해가 떠야 한반도에 아침이 온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1월1일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매년 열리는 새해 해맞이 행사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동해안의 아름다운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증강현실 모바일게임 ‘포켓몬 고’ 열풍까지 겹쳐 찾는 이가 더욱 증가하는 추세다.

간절곶을 뒤로하고 진하로 올라간다. 총 82.4㎞의 해파랑길 울산 구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진하해변에 들어서자 곧이어 특색 있는 모습을 한 다리가 나타난다. 어느 계절에나 잘 어울리는 ‘명선교’는 회야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서 진하와 강양을 이어주는 사장교다. 원전특별지원금으로 건립된 이 다리는 주탑과 케이블의 모습이 한 쌍 학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진하해수욕장 앞 명선도는 1만900여㎡ 크기의 무인도다. 음력 2~4월 중 육지와 이어지는 바닷길이 활짝 열리며 부정기적으로 물길을 열기도 한다. 조수간만 차이로 생겨나는 이 현상은 ‘울산판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하다. 명선도 뒤편으로 숨어있는 듯 한 이덕도는 진하팔경의 하나로 ‘선도귀범’(仙島歸帆)이라고도 부른다. 명선도 부근으로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는 모습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전국에서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이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모여드는 촬영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 해파랑길 울산 구간 종점부 화암 주상절리.

진하해변에서 신발 끈을 단단히 조이고 회야강을 따라 덕하역까지 따라가다 보면 오래된 동해남부선 기찻길도 보이고 외고산옹기마을의 옹기들도 눈에 들어온다. 선암호수공원을 지나 솔마루길을 걸어 울산대공원 앞을 지나가다 그윽한 커피 향에 발길을 멈추고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커피는 날이 찰수록 온기와 함께 풍미를 더하는 것 같다.

길은 태화강 전망대를 돌아 한참이나 십리대숲을 끼고 이어진다. 하늘에 걸리듯 서있는 태화루를 지나 또 한참 걷다보면 태화강이 바다와 만나는 염포삼거리까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염포산 숲길을 거쳐 지친 다리에 휴식을 취해주어야 할 시간에 다다를 무렵 멀게만 느껴졌던 현대미포조선과 울산대교가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온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야 하며,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고 했던 고 정주영 현대회장의 의지가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 한 기상으로 현대중공업의 드높은 골리앗크레인 위에 서려있는 것을 해파랑길 위에서 지켜본다.

다음날, 어제를 기억하고 있는 길은 오늘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방어진항을 거쳐 슬도에 잠시 머물다 해안산책로를 따라 대왕암 송림을 지나간다. 대왕암공원 산책길은 두 길로 나뉜다. 하나는 돌길이요 다른 하나는 흙길이다. 하지만 선택에 걸리는 시간은 잠시, 망설임 없이 흙길로 발을 옮긴다. 100년 넘은 해송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소나무 숲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대왕암 바위섬. 신라 문무대왕비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호국용이 되어 잠들어 계신다는 곳이다. 그 전설의 바위섬을 돌아본 뒤 일산해수욕장을 거쳐 북쪽 해안선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고 또 올라간다.

주전 몽돌해변에서 정자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울산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불릴 만큼 그 절경이 빼어난 곳이다. 주전에서 신명에 이르는 12㎞의 해파랑길 구간은 보석처럼 아름다운 까만 자갈이 동해안 청정지역 해변을 뒤덮고 있다. 울산 12경의 한 곳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어우러지며 연인들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몽돌해변으로 들어섰다.

몽돌은 도무지 심심하지가 않을 것 같다. 바다는 장난이 치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처럼 몽돌을 그냥 내버려두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그락자그락 차르르르.’ 파도와 몽돌이 만나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무척이나 경쾌하다. 몽돌 하나를 집어 든다. 그리고 평범한 돌 하나에 온갖 상상의 색을 입히고 나니 몽돌은 평범을 넘어서 어느새 비범한 이야기를 간직한 낭만적인 돌로 재탄생한다. 참으로 근사하다. 누군가가 말했었다. “바다는 겨울바다가 최고지.” 겨울 해파랑길을 걷다보니 그 말이 결코 과찬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총 50구간의 해파랑길 가운데 울산을 통과하는 구간은 신명해변에서 끝이 난다. 하지만 해파랑 길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길은 끊어지지 않고 최북단 강원도 고성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진하바닷가에서 시작해 신명해변에 도착하는 겨울 해파랑길을 걸으며 줄곧 떠올렸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 홍중표 자유기고가 (전)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왔던 대사였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그리고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여름바다가 동적 공간이라면 겨울바다는 정적(靜的) 공간이다. 동해를 눈앞에 두고 해와 함께 해파랑길을 따라 걷다보면 겨울바다는 쓸쓸함과 소멸의 공간이 아니라 생성과 희망의 공간임을 알게 된다. 바다는 물의 순환이 끝나는 곳인 동시에 물이 다시 생성되는 시작의 공간임에 틀림이 없다. 그 가운데 겨울바다는, 생명을 잉태하고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부활의 큰 몸짓을 지닌 소생의 공간임을 크게 깨닫게 해준다.

2016년 겨울, 비로소 해파랑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만났다. 길에서 바다를 만나고 바다에서 또 길을 만났다. 해풍에 섞여오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맡으며 소박한 인생을 배우고, 힘차게 휘몰아쳐 바위에 부딪힌 뒤 흰 포말로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겸손한 삶의 이치를 체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보았다. 12월 어느 멋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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