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치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아 마을주민·나그네 가리지 않고
지친몸 쉬라며 물한잔 주면서 본격적인 지리산 산행 응원해

▲ 백두대간 주맥을 벗어난 곳에 그냥 지나치기 힘든 주지봉(住智峰)이 솟아 있다. 소나무가 울창한 청산에 희고 깨끗한 단애로 솟아올라 아름다운 풍모를 자랑한다. 봉우리에 서면 전북 남원지역이 훤히 열려 조망이 매우 좋다.

다시 사연 많은 고개, 여원재에 섰다. 제30구간 산행에 앞서 여원재의 전설을 간직한 마애불을 먼저 찾았다. 아직 해가 들지 않은 여원재 숲속 한쪽에 오랜 날 이 땅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마애불이 있다. 한번 흘러간 날은 다시 올 수 없는 법. 또한 다시 무슨 변명도 할 수 없는 것이 지나버린 역사이다. 여원재 마애불은 그저 말 못하는 묵묵한 바위처럼 남아서 이곳의 아픈 전설을 품고 있을 뿐이다. 원래 마애불 앞으로 나있는 오솔길이 남원과 운봉을 연결하던 옛길이었다. 여원재를 넘나들던 수많은 나그네가 마애불을 향해 합장을 하고 고개를 넘었을 텐데 마애불 머리 위로 신작로가 나면서 여원재의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마애불은 저 옛길처럼 잊혀져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고갯마루에 서있는 법수보다 찾는 이가 적으니 말이다.

(30) 백두대간 제30구간
(여원재~노치마을~만복대~성삼재)
거리 20.0㎞, 시간 8시간55분
산행일자 : 2016년 8월14일

연일 폭염경보가 발령이 되는 뜨거운 날이지만 백두대간으로 가는 발길은 계획대로 예정된 코스를 따라 차질 없이 진행이 되고 있다. 오전 6시55분, 여원재의 아침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이미 폭염경보가 내려진 상황이었지만 대원들의 모습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건재해 보인다.

산행을 시작하고 들머리에서 약 1㎞정도 진행을 하면 대간 주맥에서 200m쯤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벗어난 곳에, 알고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암봉이 하나 솟아 있다. 주지봉(住智峰)이다. 소나무 울창한 청산에 희고 깨끗한 단애로 솟아올라 있어 아름다운 풍모를 자랑한다. 주지봉에 서면 좌우로 남원과 운봉 지역이 훤히 열려 봉우리 높이에 비해 조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날씨가 몹시 무더워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주지봉은 생략을 할만도 한데 모든 대원이 주지봉을 품었다가 다시 대간 길로 접어들었다. 산꾼의 산에 대한 호기심은 폭염도 막을 수가 없나보다.

 

여원재에서 시작한 제30구간 대간 길은 키가 껑충한 푸른 솔 숲, 걷기 좋은 오솔길로 노치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중간에 해발 804.7m 수정봉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편하게 길을 열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오전 8시40분께, 수정봉에 든 대원들 모습은 더위에 푹 삶겨진 것처럼 모두 파김치가 돼 있었다. 아직은 한낮의 뙤약볕이 내리지 않는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등산복은 흠씬 젖었고 구슬 같은 땀방울이 얼굴을 온통 덮었다.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폭염주의보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20여일을 넘게, 그것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일 발동되고 있으니 걷기 좋은 오솔길, 청량한 솔숲에서도 더위를 피할 재간은 없었나보다. 수정봉에서 뜨거워진 몸을 식힐 수 있게 충분히 쉬어서 간다.

 

다음 이정표는 노치샘이다. 전북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 노치샘…. 노치마을에 내려서기 직전에 만나는 아름드리 소나무 네 그루도 인상적인 곳이다. 마을 주민들이 당산나무로 지정을 하고 제를 올린다는 소나무 아래 서면 지리산 품을 따라 넓게 열리는 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절로 평온해지는 넉넉한 풍경이다. 이윽고 당산나무에서 내려서면 마을 한가운데 바위틈에서 배어나오는 샘물, 노치샘을 만난다.

노치샘은 백두대간 상에 현존하는 단 하나뿐인 우물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수량도 풍부하고 마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지금도 마을 주민들이 애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노치샘을 반겨 목을 축이고 더러는 뜨거워진 몸에 시린 샘물을 뒤집어쓴다. 뜨거운 여름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서 찬 샘으로 목을 축이고 오래 된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매미소리와 함께 정겹게 불어가는 바람에게 몸을 맡기는 이 여유로움은 저 길에 나서지 않고는 모를 즐거움이자 행복이다.

노치마을에서 본격적으로 지리산으로 드는 길목, 고리봉 가는 길은 마을에서 지리산을 향해 직선으로 나있는 마을길과 60번 국도를 따라가야 한다. 노치마을에서 도로를 따라 가는 길의 좌우는 해발이 낮은 평지처럼 보이지만 해발고도가 535m에서 585m를 오르내리는 고원 구릉지다. 또한 도로를 가운데 두고 산자분수령을 이루고 있어 양편의 수계가 확연히 갈린다. 지리산 가는 방향 도로 오른편의 물은 남원 주천면 원천천을 따라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도로 왼편의 물은 주촌천을 따라 운봉 람천으로 흐른 뒤 남강을 거쳐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아주 평평해 보이는 도로가 논밭을 가르면서 나 있지만 사람들이 경작을 하기 전에는 지리산 고리봉에서 노치마을 뒤 수정봉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주능선이었던 것이다.

▲ 전북 남원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회관 앞 나무그늘에서 대원들이 폭염으로 뜨거워진 몸을 식혔다. 걷기 좋은 오솔길, 청량한 솔숲에서도 더위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이제 와서 농지와 도로로 바뀌어버린 백두대간 구간에 대한 원천 복구를 바라지는 않지만 최소한 대간을 걷는 사람들이 차도를 따라 걷지 않게 차도와 구분되는 백두대간 이동로라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고리봉 오름 입구까지 아스팔트길을 뜨겁게 걸었다.

여원재에서 고리봉 입새까지의 완만한 산길에 비해, 급격히 고도를 올리며 거친 호흡과 영혼 깊숙이 인내를 요구하는 고리봉 오름길은 이곳이 지리산임을 실감케 해준다. 힘이 들지만 고도를 높여갈수록 바람의 결이 다르다. 청량하고 상쾌하다. 마음에 채워지는 산의 그림도 달랐다. 높아지고 깊어지고 지리의 연봉들이 헌걸찬 어깨를 늠름히 펼치고 있다.

고리봉에 서니 자동차가 넘나들 수 있게 산허리를 잘랐던 정령치는 고갯마루 상부를 덮는 생태터널 공사가 한창이라 어수선한 모습이었지만 잘렸던 산을 이어준다는 생각에 느낌이 좋다. 해발 1172m나 되는 정령치 휴게소 주차장. 쏟아지는 뙤약볕에 앉았지만 성하(盛夏)의 햇살도 지리산 자락에 내릴 때에는 부드럽게 내리는지 뜨겁지가 않다. 정령치 뙤약볕 아래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만복대로 향한다.

이름도 넉넉한 해발 1438m의 만복대(萬福臺)에 들었다. 이곳에 서면 성삼재에서 종석대, 노고단으로 올라서는 지리의 주능선 100여리가 천왕봉에 이르도록 일망무제로 열리는 곳이다. 만복대는 지리산 연봉 중 가장 넓은 억새평원이 펼쳐지고 일출 명소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대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만복이 불어오는 듯 한 지리산 청량한 바람에 몸을 맡긴다. 한 몸 가릴 나무그늘 하나 없는 산정이지만 복처럼 내리는 햇살과 복처럼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가득가득 기쁘게 받는다. 남은 산길 더 갈 생각들이 없는지 앞을 보고 뒤를 보고 천봉만학의 지리산을 자꾸만 둘러보면서 만복대에 영혼을 내려놓았다. 참으로 넉넉한 만복대의 풍광 앞에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모습들이다.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만복대에서 성삼재로 이어지는 능선은 유려하다. 모나거나 날카롭지 않은 능선이 구불구불, 부드럽게 이어진다. 작은 고리봉이 중간에 있기는 해도 약 5㎞에 이르는 산길은 맘껏 여유를 부리며 걸어도 좋을 길이다. 성삼재를 목전에 두고 작은 고리봉에 서면 이제 지리산은 만복대에서 보다 더 웅장한 모습으로 눈앞에 꽉! 찬다. 성삼재 주차장의 분주한 모습도 바로 눈앞에 보인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슴에 안고 지리산으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발걸음은 폭염경보가 무색하다. 오히려 뜨겁기 때문에 지리산이 피안처가 되는 것이다. 지리산의 너른 품이 그 모든 사람과, 그 모든 사연을 쓸어 안아주기 때문에….

지리의 청량한 바람과 말간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 가벼워진 몸으로 성삼재에 내려섰다. 이제는 가야 할 산보다 지나온 산이 자꾸만 돌아봐진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