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0)우송 최영근과 우석 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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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 이후락이 고교시절 머물렀던 중구 교동 330번지 누나 집. 고교 시절 고향 석천에서 교동으로 나와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녔던 우송은 영어 공부에 취미가 있어 이 집에 머무는 동안 항상 영어 사전을 갖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의 해외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우송 최영근과 우석 이후락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석의 민주당 시절 행적과 그가 언제부터 정치에 뜻을 두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1924년 울산 웅촌면 석천에서 태어났던 우석은 울산농고(3회)로 진학했다. 고교시절에는 석천에서 학교가 멀어 중구 교동 330번지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울산농고는 실업학교로 농업위주의 교육을 했는데도 우석은 영어 공부를 좋아했다. 따라서 호주머니에 항상 영어사전을 넣어 다녔고 화장실에도 영어 단어를 붙여 놓고 용변을 보는 동안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이후 만주로 가 육군 하사관 학교를 다니던 중 해방이 되어 국내로 돌아왔고 1946년에는 미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소위를 달았다.

6대총선 때만해도 둘의 관계 좋아
우송에 대통령이 직접 입당 권면
우석의 입김 있었을 것으로 추정
‘사카린 밀수사건’ 조사단장 우송
정부 철저한 견제 못했다는 지적도

1950년 6·25가 일어났을 때 육군참모총장 정보보좌관 자리에 있었던 그는 한 해 뒤 대령으로 육본정보차장이 되었다. 이후 29세에 별을 달았던 그는 미국으로 가 주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했다.

4·19가 일어나기 직전 그는 다시 한국으로 와 당시 민주당 정부의 요청으로 정보국을 설치하고 이를 운영했다. 이 무렵 정보국이 장면 총리 직속이 되면서 그의 권력이 막강해졌고 미국에서도 한국정보를 많이 이용해 미국의 신임도 받게 되었다.

미국이 얼마나 그를 좋아했던지 덜레스 미 국무장관 등 미 고위 인사가 한국 공항에 내리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우석이었다.

그가 정보를 총괄 관리하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이 된 것은 5·16발생 5개월 전이었다. 사무실은 나중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는 중구 예장동에 있었다.

이처럼 고위직에 있다 보니 5·16이 일어났을 때는 혁명군에 체포되어 잠시 마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우석은 출감 후 우송의 박임근(83, 서울거주) 비서를 불러 우송이 마포교도소에서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면서 약을 갖고 면회를 가라고 지시했다.

박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선생님(우송) 수감 후 제가 전농동 선생님 집에 머물렀는데 우석이 불러 그를 만난 후 제가 ‘어떻게 선생님(우석)은 이처럼 빨리 석방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혁명정부가 내가 고와서 내어주었겠느냐 미국이 겁이 나서 내어 주었지’라고 말하면서 웃었습니다”고 말한다. 이 무렵 우석은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있었다.

민주당 시절 박씨는 우석이 책임자로 있던 정보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왜냐하면 우석이 먼 인척이었고 당시 그가 모셨던 우송이 민주당 시절에는 잘 나가는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시절에는 국회의원의 권한이 막강하다보니 국회의원 비서 명함을 가지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제외하고는 어디든지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끔 정보국을 드나들면서 우석에게 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이 ‘79부대’로 알려졌는데 우석 군번이 79번이었기 때문에 정보국 이름이 그렇게 불리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대한공론사로 간 2개월 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되어 박정희 장군의 측근이 되었던 우석은 1963년 박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이후 6년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후 잠시 일본 대사로 있다가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박 정권 권력의 심장부였던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우석에 비하면 우송의 영광은 짧았다. 그는 5~6대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권력 가까이 있었던 5대는 5·16으로 단명했다. 6대에는 천신만고 끝에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천성적으로 돈을 몰랐던 그는 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가 초선으로 민주당 정부에서 정무차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언양 출신으로 장면 정권의 2인자였던 오위영 의원의 도움이 컸다. 오 의원 외에도 박순천과 곽상훈 등 신파들이 그를 적극 지지했다. 오 의원은 장면 정권에서 무임소장관으로 인사와 재정을 모두 거머쥐었다.

우석이 중앙권력의 실세로 있던 공화당 때도 김대중이 이끄는 신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울산에 많았던 것은 오위영과 우송 둘 모두 신파였기 때문이다.

울산 야당 인사들은 오위영을 울산 신파의 원조, 그리고 우송을 중시조로 본다. 8대 총선 후 지역감정이 일어나면서 울산의 많은 야당 인사들이 김영삼이 이끄는 구파를 지지하는 속에서도 김재호 박사와 오민근씨 등 신파가 득세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6대총선 때만 해도 우송과 우석의 관계는 좋았다. 박임근씨는 “민주당 시절은 물론이고 5·16후에도 우석을 만나면 항상 우송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면서 “둘은 서로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존경과 신뢰를 하는 사이였다”고 말한다.

6대 총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우송을 불러 공화당 후보로 나서줄 것을 권면한 것도 우석이 이를 박 대통령에 먼저 제안했기 때문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우송도 이 때 박 대통령의 권유를 단호히 뿌리치지 못하고 “제가 비록 야당이지만 공업도시 울산의 발전을 위해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6대에 우송이 야당의원으로 정부 정책을 철저히 견제하지 못한 것은 이런 약속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다. 1966년 울산에서 ‘한비사카린 밀수사건’이 일어났을 때 야당의 조사단장으로 울산에 파견되었던 우송은 서울에서 울산으로 바로 오지 않고 해운대 극동호텔에서 이유 없이 하룻밤을 묵어 삼성이 증거물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이 때문에 당시 야당가에서는 우송이 여당과 모종의 협상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가졌고 이때부터 우송은 조사단장이 아닌 ‘수습단장’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당시 박임근씨와 함께 우송의 비서로 활동했던 김팔용 전 울산시의회 의장(82)의 증언이다. “사카린 사건이 났을 때 우송 선생님이 저에게 삼성본사로 가 이창희 사장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에 대한 보고를 받아오라고 지시해 간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 사장이 이 사건의 주범으로 밝혀졌지만 그때만 해도 이 사장은 이 사건과는 무관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조사단이 울산에 도착할 때는 우송 선생님이 하루 전 나에게 울산으로 가 한비에 대한 조사를 하라고 해 한비 창고를 뒤져보았더니 이미 증거물은 모두 숨겨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김 전 의장의 얘기는 계속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울산에 온 우송 선생님이 공장을 둘러본 후 저에게 ‘삼성처럼 큰 회사가 밀수를 한 것은 용서할 수 없지만 내가 둘러보니 이 사건을 너무 확대해 공장이 문을 닫게 하면 우선 울산경제가 어렵고 또 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이미 수백 명이 넘는데 모두 실업자가 될 수 있다’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너무 왈가왈부 하지 말자는 말을 했습니다. 아마 그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이 사건이 나중에 정일권 국무총리를 퇴임시키는 등 큰 사건이 될 것이란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김팔용씨의 경우 이때만 해도 국회의원 비서로 활달한 활동을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비서 월급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울산 사람들이 서울로 많이 찾아와 그들을 뒷바라지 하느라고 호주머니에 돈이 남아 있을 때가 없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당시 서울 전농동에 있었던 우송 집에는 6대 선거에서 그를 도왔던 선거운동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들었는데 그때마다 김씨가 이들을 돌보아야 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국회가 가까운 무교동의 은성여관에서 잠을 잔 후 다음날 여관 아래 있던 솔로몬 다방에서 우송을 만난 후 울산으로 돌아가곤 했다.

김씨는 결혼을 한 후에는 중구 복산동 550번지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이 때 공교롭게도 현재 울주문화원장인 노진달씨(71)가 울산농고를 다니면서 이 집에서 자취를 했다. 노 원장은 “내가 자취를 할 때 김팔용씨가 허름한 가방 하나를 메고 서울을 자주 왔다 갔다 했는데 그가 최영근 의원의 비서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면서 “당시만 해도 국회의원 비서가 왜 그렇게 어렵게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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