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남목마성 제3편- 울산의 곳곳에 목장을 설치하다

▲ 구마성, 신마성 위치도.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등 여러 고문헌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울산에 위치한 방어진목장은 중앙의 사복시(司僕寺) 소속의 목장으로 조선 전기에는 울산의 동쪽 적진리(赤津里)에 있었는데, 그 둘레가 47리(里)이며, 여기에서 키우는 말이 360필로 수초가 좋다는 기록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방암산(方岩山, 현재 북구 정자 일원)과 이길곶(尒吉串, 현재 울주군 서생 일원)에 목장을 새로 설치해 소와 말을 키우려고 했으나 아직 목장이 축조(완성)되지 않아 방목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경상도속찬지리지(1469)>가 편찬될 무렵 울산지역에는 방어진목장을 포함해 모두 3개의 목장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방암산목장과 이길곶목장은 우마(牛馬)를 방목하지 않았다는 내용과 이후 이 두 목장에 대한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점으로 볼 때, 설치하려다 바로 폐지된 것으로 사료된다.

1469년엔 방어진 목장 포함
울산에 총 3개의 목장 있었으나
이후 두 목장에 대한 기록 없어
이길곶, 서생면 화정리 술마마을
남서쪽 골짜기의 ‘숙마성’ 지칭
지금의 방어진 목장은
조선후기 새롭게 축조된 신마성

이 두 목장의 위치와 관련해 울산의 학자들은 방암산목장의 경우 강동면 당사리 방바위골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무룡산(舞龍山)으로부터 동해로 뻗은 거대한 능선이 목장을 만들기에 알맞은 곳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길곶목장은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의 간절곶지역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길곶목장은 울주군 서생면 화정리 술마마을의 남서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 일명 ‘숙마성(熟麻城)’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숙마성은 타 지역의 목장성이나 남목마성처럼 그 형태나 축조방법에 있어서 목장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숙마성은 일반적인 산성의 입지와는 달리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장성(長城) 형태로 축조하였으며, 석축 성벽의 너비는 약 2.4m 정도로 매우 좁지만 대부분 할석(割石)을 이용해 내외 협축(夾築 : 겹축)으로 쌓는 등 일반적인 전투성과는 입지와 축조방법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울산읍지(1934)> 고적조에는 이 숙마성을 일명 마성(馬城)이라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숙마성의 ‘숙마(熟麻)’는 말을 기른다는 의미를 지닌 ‘숙마(熟馬)’의 잘못된 표기(오기(誤記))로 생각된다.

한편,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언급된 방어진목장은 조선후기 새롭게 축조된 지금의 남목마성[新馬城]이 아니라, 현재 동구 주전 성골(城谷)에서 북구 염포동과 양정동(楊亭洞)의 경계가 되는 심천골로 이어지는 곳에 남아 있는 구마성(舊馬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방어진목장은 그 후 임란왜란 등의 전란을 거치면서 황폐화되었고, 조선후기인 1651년에 새로운 목장(신마성(新馬城))이 축조되었으며, 이후의 기록은 대부분 이에 관한 내용이다.

1653년에는 울산 방어진목장에 낭청(郞廳)을 파견하고 이들을 통해 측량해 이정(釐正, 여러 가지 사항을 고쳐서 정함)하였고, 1654년 기록에는 왕(王)의 탄신일에 진상하는 말(진상마)을 구하기 힘들다는 사연과 함께 울산 방어진목장은 예로부터 양마(良馬)의 산지로 다른 지역 목장에 비해 최상으로 좋다는 호평도 보인다.

여러 고문헌에서 신마성의 길이는 3626보(步)라는 기록이 보여 기존의 목장과는 다른 새로운 목장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1678년 즈음에 방어진목장의 길이(둘레)는 50리로 동서 10리, 남북 15리 규모에 암수 말 401필과 목자(牧子) 93명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편, 1654년 목장을 관리하는 감독관으로 문음(門蔭) 6품인 감목관이 파견되었는데, 1628년에 두었던 동래 감목관의 관기(官基, 관아)를 1655년 남옥(南玉)으로 옮겨와 설치했다. 1832년경의 마성은 울산 고을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길이 1930보로 목장 내 말이 301필, 곡초(穀草)가 1000속(束)이 있고, 해마다 말 4필을 상납했다. 또한 목장을 유지하기 위해 둔전 60결 70부 5속과 목자(牧子)를 위한 전답 92결 94부 9속이 지급되었다.

1861년 즈음에는 장기(長鬐)의 동을배곶목장(冬乙背串牧場)이 방어진목장의 감목관에 소속되었다. 1871년경의 남목마성은 동쪽 미포로부터 서쪽 염포강에 이르는데, 규모는 길이 1913파(把)였다고 하며, 1895년 기록에는 구마성(舊馬城)과 신마성(新馬城)의 이름이 각각 등장한다.

여기서 구마성은 길이 2858파(把)로 주전(朱田)으로부터 양곡(陽谷)에 이르는 부목간(府牧間)의 표계(標堺)에 해당한다고 하며, 신마성은 길이 1913파로 1651년 울산 인근 7개 읍이 다시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1871년 <울산목장목지>에는 1655년에 7개 읍의 군인을 동원해 다시 쌓았고, 매년 목장 내에 사는 사람을 시켜 착실하게 수축(修築)한다고 했다. 1899년 <울산읍지>에는 감목관이 이미 폐지됐으며 1897년에는 서울에서 파견된 관원이 말을 팔고 돌아갔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와 같이 조선전기 울산에는 말과 소를 기르기 위한 다양한 목장성을 곳곳에 설치했고, 그 중 양마의 우수성과 관리의 효율성 등 여러 측면에서 현재의 방어진 일원이 최종 낙점되었다. 이후 방어진목장은 조선후기까지 줄곧 국방·교통·우역(郵驛)의 근간이 되었던 양마산업의 중심지로 이어져 오다가 구한말에 접어들면서 목장제도가 혁파됨에 따라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울산은 또 다른 산업의 기틀을 구축하며 근대 산업도시로서의 길을 걷는데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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