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1)7대 총선과 이후락

▲ 우석의 사 조직인 청수회 창립총회가 열렸던 시민관 옛 자리. 우석은 자신의 울산 출마를 염두에 두고 청수회를 조직해 창립 총회를 당시 시민관에서 열었지만 7대 총선에서 불출마해 당직자들과 청년들을 실망시켰다. 학성동 옛 시민관 자리에는 흥국생명이 들어서 있다.

1967년 6월 치러졌던 7대 울산 총선의 특징은 중앙의 실세였던 우석 이후락이 선거에 깊숙이 관여한 것이다. 이 선거에서 우석은 자신의 대리인으로 설두하씨를 여당인 공화당 후보로 내세웠을 뿐 아니라 설 후보의 당선을 위해 야당의 최영근 후보 선거자금을 봉쇄했다. 이것도 모자라 권력으로 김성탁씨를 중도에 사퇴시키기도 했다.

울산에서 이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는 공화당의 설두하, 민주당의 최영근, 국민당의 김성탁씨 등 3명이었는데 당초 예상을 뒤엎고 설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 무렵 우석은 중앙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급성장했는데 당시 그의 활동은 경향신문 1963년 12월7일자에 ‘막후’라는 제목으로 잘 나타나 있다.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후
국회의원 출마 결심, 청수회 조직
7대 불출마로 지구당 거센 반발
결국 10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
활동 1년여만에 朴대통령 시해돼

“5·16이 터지자 우석은 한때 구속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가 6개월을 지냈다. 이 6개월이 제2대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되는 배경이 되었다. 오늘날 정국에 도약대를 놓고 있는 이후락의 막후인물 자질은 군사정부에 의해 발굴된 셈이다. 그가 2년간 군정천하의 대변자로서 아니 박정희 혁명주의 측면 막료로서 활동해 온 몇 가지 자취를 더듬어 보면 군정 3년의 허실이 눈앞에 전개된다. 그의 막후 활동은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취임 후 1년으로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위치에서 홍보활동을 폄으로 높이 쌓인 최고회의 담장을 조금씩 헐고 군정본부의 내부 활동을 국민에게 홍보한 때이다. 후기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씨가 2인자 자리를 내어놓고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한때부터 시작해 10월, 11월 양대 선거를 치르기까지였다. 이 8개월간 그의 막후 보좌는 활성화 되었고 적극적인 행동이 감행되었다. 그의 막후 활동은 얄미울 정도로 비범했다는 게 정평이다.

(중략)

그는 제3공화국의 조각 막후에도 있다는 설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심신이 피로해 있다. 더구나 공화당 일부가 청와대 비서실장 후보인 그를 몹시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락의 행동은 사람이 재간으로만 살수 없다는 천리를 변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석이 중앙 권력의 실세가 되면서부터 울산에서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울산 발전을 위해 그가 출마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석 역시 이때부터 청년조직을 만들고 조선호텔에 개인 사무실을 두는 등 총선 출마에 뜻을 두고 있었다.

우석이 국회의원이 되려는 이면에는 오기가 있었다. 우석은 10대 총선에서 울산 당직자들을 상대로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공화당 창당 때부터라면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국회의원이 될 결심을 한 것이 1963년 6대 총선 후 대전 유성의 만년장 호텔에서 공화당 당원 교육 때였습니다. 이때 박 대통령이 당원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게 되어 있어 박 대통령을 따라 연설장으로 들어가려는데 당시 공화당의 정구영 총재가 ‘연설장에는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면서 제가 연설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 때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나도 나중에 국회의원은 꼭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정 총재는 변호사 출신으로 공화당 창당의 주역으로 활동했지만 나중에 박 대통령이 3선 출마를 굳히자 이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당을 떠났다.

우석이 이처럼 중앙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서 나중에 울산 출마를 위해 만든 사조직이 청수회(淸水會)였다. 청수회 창립총회는 시민관(현 학성로 흥국생명자리)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모임에 우석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수 천 명의 울산 청년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청수회 초대회장은 김영호씨가 맡았고 창립 취지문은 최종두 시인이 작성했다. 이에 앞서 김씨와 최 시인은 청수회 창립총회 취지문을 우석에게 보이기 위해 용산에 있었던 우석 집을 방문했다. 당초 ‘청수회’는 ‘청’자를 ‘맑을 청(淸)’이 아닌 ‘푸를 청(靑)’자를 썼다. 그러나 이를 본 우석이 김씨와 최 시인에게 “청수회 조직이 대부분 청년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모임 이름을 푸를 청자를 붙인 모양인데 젊은이들의 단체는 맑게 운영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면서 한문을 바꾸었다.

우석은 또 창립취지문의 내용이 좋다면서 최 시인을 칭찬한 후 청수회 활동을 울산으로만 국한하지 말고 전국으로 확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최 시인이 “이런 단체가 전국적 규모가 될 경우 흡사 자유당 시절 반공단체처럼 될 수 있어 선생님의 뜻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답변하자 우석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우석이 이 때 청수회 조직을 얼마나 아꼈나 하는 것은 김씨와 최 시인을 자신의 집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만나주었다는데서 알 수 있다. 최 시인의 회고담이다.

“당시 우석 선생은 중앙의 실세로 장관과 기업인들이 그를 만나 5~6분 얘기를 하기 위해 1~2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도 우리들에게는 저녁식사까지 대접한 후 울산 관련 각종 현황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을 보고 우석이 참으로 울산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영호 회장은 청수회 창립 당시 시계탑 사거리 인근에서 태화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울산에서 제일 좋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던 그는 인심이 좋아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회장이 된 후 7대 총선에 우석이 출마할 것으로 믿고 자신의 돈을 쓰면서 청수회 관리를 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우석이 설두하씨를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바람에 약국 운영으로 벌어 놓았던 돈만 날리고 말았다.

이후 우석이 중앙정보부장으로 가면서 그를 데리고 갔지만 평생 약국만을 운영해 세상을 넓은 눈으로 보지 못했던 그는 서툴게 정치권을 맴돌다가 가산만 탕진하고 나중에 부산으로 이사를 가 이곳에서 타계했다.

7대 총선에서 우석의 불출마가 확실시 되자 울산의 지구당 당원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우석이 당원들을 불렀던 곳이 서울 청진동 한일관이었다. 한일관은 당시 울산의 당직자들이 서울에 오면 머물렀던 영남여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우석은 울산의 당직자들과 유지들이 참석한 이 모임에서 ‘한 송이 눈을 보아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라는 ‘고향설’까지 직접 부르면서 애향심으로 당원들을 달래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 당원들을 설득하지 못했던 우석은 서울 모임 얼마 후 울산으로 와 울산호텔에서 다시 이들을 만났다. 우석의 요청으로 기자들의 출입마저 금지된 이날 모임에서도 당직자들과 지역 유지들이 우석의 출마를 간곡히 권유했지만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대신 이날 모임에서 울산의 모 인사가 우석의 말을 들은 후 당직자들과 유지들의 항의와는 관계없이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인 이 실장님의 얘기를 들으니 3년 먹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하다”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나중에 ‘울산 3기’의 한명이 되기도 했다.

우석은 중정부장이 되기 직전 일본 대사로 있을 때도 울산 출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청와대로 가 직접 박 대통령을 만나 출마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때 박 대통령이 그에게 제시한 것이 중앙정보부장 자리였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박 대통령이 우석에게 이런 중대한 자리를 맡긴 것은 자신의 장기집권을 앞두고 우석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후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결심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지만 주일대사와 중앙정보부장 등 요직을 거쳤던 관계로 미루어오다가 정작 국회의원이 된 것은 1978년 10대 총선 때였다. 그것도 공화당 후보가 아닌 무소속으로 출마를 해야 했고 이마저 일 년 남짓 활동을 하다가 박 대통령의 시해로 자신이 주도한 유신체제의 종말을 지켜봐야 했다.

공업단지 울산의 초석을 다지고 많은 학교를 세워 울산의 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했던 우석이었지만 정치적 기복이 심했던 그의 삶은 결코 밝았다고만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9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