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끝) 백두대간 제31구간 - (성삼재~노고단~천왕봉~중산리)
거리 31.8㎞, 시간 12시간20분
산행일자 : 2016년 8월28일

▲ 백두대간 종주 마지막 구간인 지리산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우중산행을 해야 했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향하는 오름길에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하늘이 밝아지자 대원들이 침묵을 깨고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다.

버스를 타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중에 비가 내린다. 산행 중 비와 함께 걸은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 비는 왠지 아쉽다. 오늘 들어야 하는 산이 지리산이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종주 마지막 구간이고 그것도 온전히 지리산만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구간인데 말이다.

굽이굽이 차창에 흔들리며 성삼재에 도착하니 잿마루를 넘어가는 바람마저 차갑게 불어온다. 휴게소는 아직 시간이 일러 문을 열지 않았고 비를 피해 산행 준비를 할 곳이 화장실뿐이다. 차에서 내린 대원들이 급히 화장실에 들어가 산행 채비를 한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는 가뭄 끝에 모처럼 내리는 비라서 우의를 입지 말고 산행을 해볼까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어둠 속, 비 내리는 성삼재의 기온은 섣부른 산꾼의 맘을 금방 되돌리게 했다. 성삼재의 기온은 서늘하다 못해 차가울 정도다.

이상향을 감춘 산으로 알려지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찾은 이들에게
삶의 터전 주고 시름 덜어준 쉼터
백두대간 종주 최종구간으로 선택

오전 3시50분, 우중산행 채비를 끝내고 노고단을 향해 진군을 시작한다. 산행 시작 30여분 뒤 노고단 대피소를 통과하면서 장비 점검을 다시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나마 비를 피해 대원들이 집결할 수 있는 대피소 취사장에는 이미 대피소에서 밤을 보낸 산객들이 취사와 산행 준비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종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와 쌀쌀한 기온을 감안해서 대원 개개인의 장비와 전체 일정을 되짚어 봤으면 싶었지만 할 수 없이 비가 내리는 어두운 지리산 주능선 속으로 본격 산행에 돌입을 한다.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와 함양군 마천면 음정리를 잇는 벽소령.

어제 저녁만 해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초가을 하늘을 이고 있었다는데 불과 몇 시간 차이로 우중산행이다. 지리산에 뜬 별과 함께 걷겠다던 기대는 공염불이 되었고 내리는 빗소리와 펄럭거리는 우의의 거추장스러움만 행렬의 침묵을 깬다. 대원들은 저절로 묵언의 수행자가 되어 란탄 불빛을 따르고 있다. 임걸령에서부터 희미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고 올랐다가 되돌아와야 하는 반야봉은 우중이라 패스를 했다. 비와 안개가 품어버린 반야봉이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나없이 웅장한 지리 산경을 마주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겠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대원들 표정은 밝아졌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내려서는 가파른 계단에서도,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가는 오름길에서도 앞뒤 대원들 간에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며 웃는 모습들이다. 어둡고 미끄러운 빗길에 집중하느라 의도치 않았던 묵언수행에서 해제들이 되었다.

길섶의 꽃들은 우중에도 빗방울을 머금은 채 청초하게 피어 산꾼들을 반겨준다. 투구꽃과 용담이 짙은 보라색 옷을 입었고 쑥부쟁이와 구절초도 가을이 그리운지 꽃잎이 벙글었다. 해발 1500m이상의 지리의 능선들은 벌써 가을꽃들을 피워내며 뒤에 올 계절을 예비하고 있었다.

▲ 벽소령 인근의 형제봉과 대피소가 있는 벽소령에 달이 걸린 모습은 지리 10경 중 제4경에 들 정도로 아름답다. 형제봉 앞 기념촬영.

오전 8시20분에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하고, 이어 형제봉을 지나 벽소령 대피소까지 내처 간다. 우의를 입고 산행을 이어오기는 했지만 땀과 습기로 온몸이 젖어있고 기온이 낮아 전 대원 합류를 위해 선두에서 진행하는 대원이 능선 상에서 뒤에 오는 대원들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적당한 대피소가 나올 때까지 삼삼오오 소그룹으로 나누어 꾸준하게 길을 이어가는 것이 우중산행의 한 방법이다. 지리산 대피소 중 벽소령 대피소의 취사장은 비교적 널찍하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곳이라 이렇게 궂은 날은 쉬어가기가 알맞은 곳이다. 해서 벽소령 대피소에서 넉넉히 쉬어서 간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와 함양군 마천면 음정리를 연결하는 고개 벽소령(碧宵嶺)…. 부를 때 소리음이 맑고 품은 뜻이 고고하다. 벽소는 벽소한월(碧宵寒月)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벽소령 인근의 형제봉과 대피소가 있는 벽소령에 달이 걸린 모습은 지리 10경 중 제4경에 들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휘영청 푸른 달이 솟은 밤에 벽소령에 선 것은 아니었지만 비와 운무가 휩싸고 도는 벽소령의 오늘 풍광만으로도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국립공원 제1호, 지리 10경은 다음과 같다.

1.천왕일출(天王日出) 2.노고운해(老姑雲海) 3.반야낙조(般若落照) 4.벽소명월(碧宵明月) 5. 연하선경(烟霞仙境) 6.불일현폭(彿日懸瀑) 7.직전단풍(稷田丹楓) 8.세석(細石)철쭉 9.칠선계곡(七仙溪谷) 10. 섬진청류(蟾津淸流)

덕평봉을 지나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비샘에서 물 한 모금을 먹고는 아름다운 세석을 품은 영신봉을 향해 부지런한 발걸음을 옮긴다. 신라 때의 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이후 지리산의 청학동 즉 전설에 나오는 이상향의 한 곳으로 지목되는 곳이 세석평전이다.

저 스님아 산이 좋다 말하지 말게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저 뒷날 내 자취 두고 보게나
한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

인명사전에 출생연도의 기록은 있으나 졸한 흔적이 없는 고운의 시다. 지리산을 좋아하고 지리산에 들었다가 청학동 신선이 되었다는 고운 최치원, 아마 최치원의 다음 글이 지리산 어딘가에 청학동이 있고 그를 신선이 된 인물로 기억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네
선인이 옥 베개를 밀치니 몸과 세상이 문득 천년이로다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가을이 가니 낙엽이 하늘에 흩날리네
지극한 도는 문자를 떠나는 것, 원래의 모습 눈앞에 있도다
자연의 흥취를 시로 읊조리나 어느 누가 이 기미를 알겠는가
무심히 달빛을 바라보며 묵묵히 앉아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네
천지의 비밀을 말해 어찌 혀를 수고롭게 하겠는가
강이 물을 버리니 달빛이 그림자 되어 내 마음과 통하네.

고운 최치원은 9세기, 지금으로부터 1100여 년 전 사람이다. 그 시대에 이미 지리산은 단순한 산, 그 이상의 의미로 이상향을 품은 경배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서기 1610년 9월 천왕봉에 올랐던 조선 중기의 문신 박여량(朴汝樑)은 ‘노역을 피해 숨어든 무리와 복을 비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봉우리와 골짜기에 낱알이 어지러이 널려있는데도 나라에서 금할 수 없으니 탄식할 일’이라고 <두류산일록>에 남겼다. 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천왕봉에는 늦봄부터 가을까지 6~7개월 동안 영호남과 경기지방에서 농부 등 남녀 무리가 얼마나 많이 몰려드는지, 풍기문란과 실농위기를 맞을 만큼 심각하다’고 썼다.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 섬멸되었습니다.’ 1955년 5월 지리산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가 지리산 주요 길목에 내건 안내문이라고 한다. 혼란의 시기에도 산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문을 걸어 배려를 한 것이다. 이처럼 지리산과 관련된 여러 사료들을 보더라도 지리산은 현대사에 와서만 시중 장터처럼 북적대는 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은 이상향을 감춘 산으로 알려졌고 사람들은 행여 그 이상향의 어귀라도 볼 수 있을까 하여 지리산으로, 지리산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혹자는 세석 어디라 하고, 더러는 화개동천 어디쯤이라 하기도 하고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을 지나야 청학동을 만난다고 하는 설이 난무한다.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그러나 무변장쾌하게 펼쳐진 산자락이 때맞춰 나무와 풀꽃을 피어내고 바람이 비를 모아 사시사철 맑은 물을 흐르게 하는 산, 일상에 지친 육신이 언제 어느 때고 찾아들면 가없는 무량함으로 넉넉히 영혼을 달래주는 산, 어디에 따로 이상향의 청학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있는 이곳, 한없는 평화로 앉아서 능선을 넘어가는 바람을 쐬고 있는 이곳이 바로 청학동은 아닐까. 지리산은 우리 민족이 등을 기대고 살아온 단순 삶의 터전뿐만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쉬어가고 위로 받고 시름을 더는 영혼의 쉼터가 되었던 것이다.

시대와 세월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를 대며 지리산에 들었다. 오늘 우리는 ‘백두대간 종주’라는 미명으로 지리산에 들었다. 비가 오는 중에도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인 것처럼 억척스럽게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수십, 수백, 수천 년이 지난 뒤 그때의 사람들은 오늘의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천왕봉에 서 있으려니 바람이 폭풍처럼 불어와서 등을 떠민다. ‘행여 견딜만하면 오지 마시라’고 한 이원규 시인의 시구를 화두처럼 안고 백두대간 마지막 봉우리 지리산 천왕봉에서 내려선다.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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