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창호 극작가

바둑돌은 한 번 놓으면 무를 수 없고 사나이의 입은 천금같이 무거워야 하느니라. 왕자 승경이 궁정의 잣나무 아래에서 선비 신충과 바둑을 두며 덧붙였지. 훗날 내가 임금이 되었을 때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돼 줄게요. 신충은 승경에게 감사의 절을 했어.

승경은 몇 달 뒤 효성왕이 되었지. 근데 왕은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그 차례에 넣질 않았어. 신충이 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노래로 지어 그 가사를 적은 족자를 가지에 걸어두니 잣나무가 죽어가는 게야.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냈더니 신충이 지은 노래를 갖다 바쳤지. 왕은 놀라 말했어. 나랏일이 너무 바빠 각궁(角弓)―주나라의 유왕이 친인척을 멀리하고 간신들을 좋아하니 골육이 서로 원망하면서 지었다는 시―을 잊고 지낼 뻔했구나. 곧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에 새 잎이 나고 가지에 물이 돌거든. 사무친 원이 주술의 힘을 발휘한 게야.

뜰 앞의 잣나무를 바라보니/ 가을도 아닌데 시들어가네/ 자네를 어찌 잊으랴 하시던 말씀/ 우러러 뵙던 얼굴 있지마는/ 달그림자 비친 연못 위로/ 일렁이는 물결에 마음 흔들려/ 님의 얼굴 떠올려 봐도/ 세상일 그저 아쉽기만 하네.

진골 출신이 지은 유일한 향가인 원가(怨歌). 후렴구가 전하지 않는 이 가사를 보면 향가의 숭고한 내용이 많이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지. 신충의 행실을 살펴보건대 능란한 처세술을 향가에 이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 어쨌거나 신충을 끔찍이도 아낀 임금의 마음은 다음 임금인 경덕왕까지 이어져 상대등에 오를 수 있었지.

하지만 신충은 경덕왕이 당나라의 궁정 양식과 정책을 적극 받아들인 한화정책을 펴는 동안 갈등을 일으켜 마침내 벼슬을 내려놓고 남악으로 들어갔어. 왕이 두 번씩 불렀으나 산속에서 나오지 않고 머리 깎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짓고 살았지. 거기 금당 뒷벽에 경덕왕의 진영을 모시고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했고. 법당에서 참선 정진을 하며 신충은 효성왕을 탓하며 지은 원가가 결국 자신의 권력욕을 노래한 것임을 깨달았을까?

장창호 극작가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