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2)최영근과 설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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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 이후락의 견제 속에 7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서울로 가 제일생명 사장이 되었던 우송 최영근이 제일생명 준공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우송이 야당 생활을 할 때 민주당 총재로 그를 도왔던 박순천 여사가 뒤 의자에 앉아 있다.

우석 이후락과 우송 최영근은 6대 총선 때까지만 해도 서로 우호적이었다. 우석은 6대 총선에서 야당의 우송을 공화당 후보로 출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우송을 불러 공화당 후보로 울산에서 출마해 줄 것을 요청한 것도 우석 이후락의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송은 박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하고 야당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중앙 요직에서 물러난 후 울산 출마를 계획하고 있었던 우석이 우송을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한 것이 이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우석으로서는 이미 2선 의원을 지냈던 우송이 다시 이 선거에서 당선될 경우 자신의 입지가 좁아 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6대 총선에서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도 무리하게 김성탁을 공화당 후보로 내세워 분패했던 우석에게 7대 총선은 양보할 수 없는 한판이었지만 그렇다고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자신이 자리를 박차고 출마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중앙요직에서 물러난 후 국회의원 출마 계획했던 우석 이후락
7대 총선 출마한 우송 저지 위해 설두하씨 대리인으로 내세워
우송과 주변인들 경제적으로 어렵게 만들어 정치활동 접게해

이렇게 해 그가 대리인으로 내세운 인물이 교육자 출신으로 당시 울산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었던 설두하씨였다.

울산 사람들이 울산 출신 교육자로 지금까지 존경하는 인물이 두 명 있다. 한명이 북구 어물동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히로시마고등사범을 졸업한 후 대구사범 교사를 거쳐 경기여고 교장까지 지냈던 금계(琴溪) 박관수(朴寬洙)씨다.

또 다른 한명이 교육자로 청빈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했던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 전신) 출신의 설씨였다. 해방 후 방어진과 대현중학교 설립에 직접 참여해 이 학교 초대 교장이 됐고 1946년 차용규씨와 손정수씨가 건립한 울산중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던 설씨는 정치때가 전혀 묻지 않은 참신한 인물이었다.

우석은 이처럼 울산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설씨를 공화당 후보로 내세웠기 때문에 그의 당선을 확신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6대 때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던 김성탁씨가 국민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는 바람에 설씨의 당선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왜냐하면 김씨가 비록 야당 후보였지만 6대 총선에서 그를 도왔던 공화당 조직을 그대로 갖고 있어 그가 출마할 경우 여당표가 분산될 가능성이 높았다. 더욱이 김씨는 이 선거에서 자신이 공화당 후보로 공천 받지 못한 앙심을 품고 민주당의 최영근 후보 보다는 설 후보를 집중 공략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석이 설씨 당선을 위해 꾸민 전략이 최 후보의 선거자금줄을 막고 김씨를 중도 사퇴시키는 일이었다. 이 전략은 적중했다.

7대 총선에서 우송이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어려움이 선거자금 부족이었다.

6대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우송은 청량리역에서 가까운 전농동에서 살았다. 당시만 해도 울산 사람들이 서울에 갈 때는 요즘처럼 경부선을 이용하지 않고 청량리역이 종점인 중앙선을 주로 이용했다. 이러다보니 울산사람들 대부분이 청량리역에서 내린 후 우송 집에 둘러 여독을 푼 후 서울에서 볼일을 보았다.

심지어는 강원도에서 병영생활을 했던 울산 출신의 병사들도 청량리역을 이용했기 때문에 휴가를 나오고 귀대를 할 때마다 우송 집에 들리는 바람에 우송 집은 항상 식객들로 붐볐다.

당시 우송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인물로는 최형우, 김철인, 최영보씨가 있다. 최형우씨는 당시 동국대학을 다니면서 동천학사에서 숙식을 해결했지만 정치지망생이 돼 시도 때도 없이 우송 집을 드나들었다. 김철인(현 대인화학 사장)씨는 울산 야당의 대부 김인갑씨 장남으로 강원도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그 역시 휴가를 오갈 때 이 집을 드나들곤 했다.

나중에 울산택시 사장이 되는 최영보씨도 동국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이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대학 시절 한일회담 굴욕외교 반대 등 학생운동을 펼치다가 나중에 박 정권에 의해 강제 입영하게 된다. 그는 입영할 때까지도 이 집에 머물면서 최 의원을 찾아오는 울산 사람들을 대접하는 집사로 활동했다.

이렇게 울산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다보니 그들을 대접하느라고 우송은 매달 세비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7대 총선 때 우송의 비서로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 했던 박임근(83·서울 거주)씨의 이야기다.

“7대 총선에서 선생님은 자금이 없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야당이 여당 후보만큼 돈을 많이 쓸 수는 없지만 선거운동원들이 기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했는데 그때는 돈이 없어 선거운동원들에게 밥값도 줄 형편이 못됐습니다. 당시 우리 사무실이 어려웠던 요인 중 하나가 평소 선생님을 좋아했던 지역 인사들마저 자금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대 총선 때만 해도 큰돈은 아니더라도 울산 유지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거 때면 몰래 당 사무실로 와 봉투를 두고 가곤했습니다. 그러나 7대 총선에는 전혀 이런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지역 유지들이 아마 이후락 선생님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거 종반 이처럼 돈이 없어 사무실이 어려움을 겪자 선생님이 저를 몰래 부르더니 ‘서울로 가 서정귀 사장을 만나면 일정 액수의 돈을 줄 것’이라면서 나를 서울로 갔다 오라고 했습니다.”

서사장은 통영 출신으로 경남도의원 생활을 우송과 함께 했을 뿐 아니라 5대 총선에서는 국회의원에 당선돼 민주당 시절 우송과 함께 정무 차관을 지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인 서 사장은 5·16후 정치를 그만두고 실업계에 투신해 국제신보와 흥국생명 사장을 지낸 후 이 무렵 호남정유 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돈이 많았다.

박씨의 얘기는 계속된다.

“그런데 서울에서 서 사장을 만났더니 선생님의 생각과는 달리 ‘최 의원이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했으면 됐지 앞으로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이번에도 출마해 이처럼 고생을 하느냐’며 오히려 선생님을 나무라면서 돈을 조금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공화당이 3선 개헌을 위해 한 석이라도 더 차지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서 사장 역시 야당 후보에 대해서는 절대로 선거자금을 제공하지 말라는 명령을 위로부터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특히 당시 중앙의 실세였던 이후락 선생님이 이런 지령을 서 사장에 내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우송은 선거기간 내내 자금의 어려움을 겪었고 막판에는 야당의 투개표 참관인들에게 일당도 주지 못했다. 그의 낙선은 자신은 물론이고 그만 믿고 따라다녔던 사람들까지도 경제적으로 어렵게 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우송을 어렵게 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우석이 결국 김성탁을 설득시켜 그에게 선거가 끝나면 농림부 장관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중도 사퇴시켰다. 이후 김성탁은 병영시장에서 열린 합동 유세에서 자신의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성남동 신한장 여관에 설 후보 지원 본부를 차려 놓고 최씨를 비난하면서 설씨의 선거 유세를 도왔다.

오위영, 정해영씨와 함께 울산 야당의 기대주였던 우송은 7대 총선을 통해 울산이 우석의 철옹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재기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과 함께 정치 활동을 접었다.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우송이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제일생명 사장이 돼 서울로 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이처럼 어렵게 당선을 시켰던 설씨는 7대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3선 개헌 반대에 앞장 서는 등 우석의 의중을 읽지 못하고 야당편을 들어 우석을 실망시켰다. 우석 역시 이 선거에서 김성탁에게 약속한 농림부장관 자리를 주지 않아 김씨가 8대 총선에서 오기로 다시 출마, 공화당의 박원주 후보를 집중 공략하는 바람에 정치 초년생인 최형우씨가 당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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