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시조 일러스트=김천정

한 치 틈도 허여 않고 흙과 돌 살을 맞댄
성곽 안 둘레길엔 넘지 못할 선이 있다
배흘림 성벽을 따라 나부끼는 저 깃발들

밑돌은 윗돌 받치고 윗돌은 밑돌을 괴고
저마다 가슴에는 난공불락 성을 쌓는,
팔달문 층층 불빛이 도르래에 감긴다

망루에 올라서면 성채 너머 또 다른 성
가납사니 군말 아닌 실사구시 공법으로
날마다 허물고 쌓고 허물어선 다시 쌓고

장안문 홍예(虹霓)를 짓던 옛 사람은 어디 갔나
그때 그 거중기로 들어 올린 금빛 아침
빗살문 빗장을 따고 성문 활짝 열고 싶다

 

당선소감-박수근 / 투박하지만 정감가는 옹기같은 시조 쓰고 싶어

▲ 박수근

고등학교 재학시절 가곡 ‘성불사의 밤’ 가사가 동문 대선배이신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시조에 곡을 붙인 것을 알고 시조에 매료되었습니다. 지금도 창작에 골몰할 때는 이 가사를 암송해보는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시작과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공학도로서 35년을 훌쩍 넘겨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우아한 백옥 자기를 구워내는 도공보다는 투박하지만 정감이 가는 항아리를 빚어내는 그런 옹기장이가 되고 싶습니다. 그 항아리 속에 감을 담가 떫은맛을 우려내듯이, 비린내 나는 생멸치를 소금에 버무려서 정갈한 젓갈로 삭히듯이, 그 항아리 속에 질박한 제 인생을 담아 예리한 모서리를 삭혀내면서 둥글둥글한 모습으로 살고 싶습니다. 민족시사관학교 윤금초 교수님과 여러 선배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저의 졸작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경상일보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평생 동반자인 아내 홍미경과 두 아들 희열, 희원과 이 기쁨을 함께 하겠습니다.

약력
●경남 함안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공학박사
●국제기술사(IPEA-IntPE, APEC Engineer)
●현재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 재직 중
●2014년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월 장원

심사평-조동화 / 신인의 참신성·가능성이 엿보이는 작품

▲ 조동화

신춘문예 심사를 맡은 선자가 후보작품들에서 우선적으로 고대하는 것은 고만고만한 수준의 안정감과 완결성보다는 조금 서툴더라도 신인으로의 가능성과 참신성일 것이다.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열두 분, 총 65편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장시간에 걸쳐 여러 번을 통독한 끝에 ‘소나기 그 후’ 외 2편, ‘까치고개’ 외 3편, ‘구름 평전’ 외 2편, ‘도르래, 빛을 물다’외 4편을 결심에 올렸다. 네 분의 도합 15편의 작품들이었다.

선자는 1차적으로 결심에 오른 작품들이 얼마만큼 고른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가늠해 보았다. 그 결과, 나머지 작품들이 다소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까치고개’와 뒤에 딸린 작품이 완결성 면에서 좀 떨어지는 ‘구름 평전’을 먼저 제외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선자는 ‘소나기 그 후’와 ‘도르래, 빛을 물다’ 이렇게 두 작품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이 두 작품은 함께 보낸 다른 작품들의 수준과 역량 역시 엇비슷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운용, 작품으로 읽어내는 시대적 고뇌 등도 막상막하였던 것이다. 선자는 마침내 신인으로서의 참신성과 가능성이라는 비장의 잣대를 꺼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이르러 두 작품의 우열은 어렵사리 드러나, ‘도르래, 빛을 물다’를 영예로운 당선의 자리에 올려놓게 됐다.

당선작 ‘도르래, 빛을 물다’는 수원화성의 둘레길에서 민족의 큰 스승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며 오는 시대를 희망적으로 갈망하는 패기만만한 작품이다. 아무쪼록 가슴에 장착한 거중기로 이제까지 누구도 열지 못한 한국시조문학의 육중한 성문 하나를 활짝 들어 올려 주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약력
●1949년 경북 구미 출생
●중앙일보, 조선일보,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낮은 물소리> <영원을 꿈꾸다> <나 하나 꽃 피어> 등 발표
●이호우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통영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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