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시조 일러스트=김천정

외벽에 녹슨 고래 몇 마리
물 바깥으로 나와 숨을 쉰 흔적
그 숨을 찾는 심장소리가 손끝에서 떨렸다

혼신을 다해 호기롭게 살았을
먼 우주를 되짚어도 더 이상의 숨은 없다

때때로 바람이었다가 절벽이었다가
수세기의 흔적이
수 천 년 거리에서
천변 반구대를 서성였을

내세의 염원과 사랑을 갈구하는 수단이 손아귀 힘이었다면

피눈물로 쪼아서 새긴 그 기원이
울음에 갇혀 해답을 기다리는 동안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늙은 고래가 볼모로 잡혀있다
녹슨 세월이 한데 엉겨 붙어서

아직 물을 건너지 못한 배고픔과 서러움
매질과 학대와 손가락질
슬픈 작살에 핏물이 번지고
뼈와 살이 바람으로 흩어지고

다른 행성에 잘못 온 것처럼
가압류 딱지가 붙어버린
고래의 적막은 한겨울처럼 쓸쓸하고
세상의 기억은 겨울 끝에 머물러 있다

 

 

당선소감-김예진 / 멈추지 않고 나의 시를 위해 새 길을 내겠다

▲ 김예진

고래를 만나러 가던 날은 햇살이 눈부셨다. 이르게 핀 꽃들은 이미 지고 있는데 느리게 피는 꽃들은 이파리들 속에서 작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어디로 가든 길은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해 있는 걸까. 선사시대는 대곡천을 열어 나를 받아들였고 바위 속에서 나온 고래는 한참을 나와 어울렸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불을 지피는 사람들은 언제나 치열하고, 뜨거운 꿈을 꾸는 자들이다. 멈추지 않는 사람들만이 바다를 만나고 풍랑에도 거뜬한 고래를 만날 수 있다. 몇 번이나 서로 다른 꽃들이 피고 지고 바람이 싸늘하던 날, 환청처럼 당선소식을 받았다. 먹먹했다. 다시 고래를 만나러 가야지. 이젠 더 이상 서럽거나 외롭지 않게 나와 내 고래와 내 시를 위해 암벽에도 새 길을 만들어야지.

부족한 제 시에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경상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한결 같은 응원으로 곁을 지켜준 사랑하는 가족과 부산시문학식구들과 기쁨을 같이 합니다.

내 시의 시작이며 바다인 현대문예창작교실에서 한 곳을 바라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어주고 끌어주는 믿음직한 도반들, 그 중심에서 고래와의 소통을 가르쳐 주신 권애숙 선생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1959년 경남 진주 출생
●한국방송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나태주 / 세상을 보는 따스한 안목이 마음을 울려

▲ 나태주

예심을 통과한 다섯 분의 작품 20편을 읽었습니다. 모두가 짱짱한 필력으로 쓰여진 역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불편한 마음이 없지 않았고 자꾸만 뒤가 돌아보아졌습니다. 이 작품들보다 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을까 싶어서였습니다. 결국은 바로 이 작품이다, 하고 눈에 썩 들어오는 작품이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모든 작품들의 길이가 너무 길고 요설이 많은 것이 우선 불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작가의 의도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동인데 이쪽에서 억지로 감동을 좀 해보려고 그래도 감동이란 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선자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142번의 ‘넙치의 잠’이란 작품과 51번의 ‘고래를 격려하며’란 두 작품이었습니다. 두 작품 역시 길이가 만만치 않게 길었고 요설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오랫 동안 두 작품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래를 격려하며’란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해양세계가 배경이고 자연사적 내용을 담고 있어 이미지가 신선하고, 매우 흥미로웠지만 그래도 마음의 울림이 가는 쪽은 ‘고래를 격려하며’였습니다. 사물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안정되어 있고 따스하다는 점도 선자의 마음을 얻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시를 많이 남겨 민족의 언어에 큰 유산을 보태시기 바랍니다.

약력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대숲 아래서> 외 37권 출간
●43년간 초등교단 생활 후 정년 퇴임
●공주 풀꽃문학관 설립·운영
●현재 공주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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