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창호 극작가

신라 때 포산(비슬산)에 숨어 산 관기와 도성.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는데 서로 십리가량 떨어져 있었지. 두 사람은 낮엔 구름을 헤치고 달밤이면 노래하면서 서로 오갔어. 도성이 관기를 부르면 나무가 남쪽으로 휘어지며 관기를 맞이하는 것 같아 관기는 도성에게 가고, 관기가 도성을 보고 싶으면 나무가 북쪽으로 구부러져 도성이 관기에게로 갔대. 어느 날 도성이 뒷산 바위에서 온몸을 솟구쳐 하늘로 떠난 얼마 후에 관기도 그렇게 세상을 떴고. 도성이 도를 닦던 바위 아래엔 훗날 사람들이 도성암을 지어 그의 덕을 기렸지.

비슬산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야. 35년간을 여기서 살았거든. 스물세 살(1228년)에 보당암에서 첫 인연을 맺었지.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남해 정림사로 옮겨간 때를 빼고 이 산자락에서 거처를 옮기면서 지냈어.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여길 떠나지 않았지. 오자주(五字呪)를 염하며 나라의 앞날을 빌던 중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고 곧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거기서 ‘삶의 경계는 줄어들지 않고 부처의 경계는 더함이 없다’라는 화두를 암구하여 ‘오늘에야 비로소 삼계(천지인)가 꿈만 같고 대지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알았다’고 포효한 곳도 여기니까. 스님은 경작지를 앗기고 산간벽지에서 화전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과 함께 산 게지. 왕실에서 주는 호사를 마다하고. 이 기간 동안 ‘장맛을 본 적이 없고, 무심한 구름을 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는 참회도 남겼지. 보당암, 무주암, 인홍사 등 비슬산 인근의 거처 가운데서도 비슬산이 가장 좋았던 모양이야.

비슬산에 가서 관기와 도성이 다녔다는 길을 발걸음으로 헤아려 보니 알겠데. 두 성인이 오간 북쪽 대견봉에서 남쪽 관기봉에 이르는 주능선, 칠천 걸음 남짓한 길에 관목과 풀이 서로의 안부가 궁금한 듯 바람에 몸을 눕히는 걸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오겠더라는. 도성암을 보고 도성의 자취를, 관기봉 아래의 너덜 어디쯤이 관기가 머문 자리일 거라는 어림짐작은 하겠데.

장창호 극작가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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