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3)이후락과 김성탁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지난 7대 총선에서 우석은 울산시 울주군 웅촌 석천의 별장으로 김성탁 후보를 불러 내무부 장관 자리를 주겠다면서 사퇴를 종용했다. 그 별장은 지난 해 초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 별장은 뜯기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7대총선에서 설두하씨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우석 이후락이 가장 걱정했던 것이 김성탁의 출마였다. 이 선거에서 김씨는 공화당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김씨가 다시 출마한 것은 나름대로 당선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6대 총선에서 비록 낙선했지만 당시 지역사업을 많이 해 놓아 7대 선거에서 주민들이 지지해 줄 것으로 믿었다.

김씨는 6대 총선까지만 해도 제대로 모임이 이뤄지지 않았던 ‘가락종친회’에 많은 기금을 주어 문중 모임을 활성화 해 이를 선거 조직으로 이용했다. 오늘날 ‘가락종친회’가 울산의 대표적인 문중이 된 것은 당시 김씨의 도움이 컸다.

7대 총선서 우석이 설 후보 천거하자
최영근 후보보다 설 후보 공략에 집중
‘3기 7암’ 언급하며 우석 당황케 해

선거 유세중 우석 별장에 납치당해
농림부 장관·선거자금 전액 보상 등
회유책에 사퇴선언하고 설후보 도와

14표 차 분패 역시 그를 다시 출마케 했다. 6대 총선에서 전국 최근소 표차로 그를 낙선시켰던 최영근 의원과 7대 총선에서 꼭 한 번 다시 붙겠다는 각오로 낙선 후 절치부심해 왔다.

그러나 7대 총선에서 우석이 설씨를 천거하자 그는 실망했고 이러다보니 자신의 당선보다는 설 후보를 낙선시켜야겠다는 오기로 다시 출마하게 되었다.

선거 초기 판세는 김씨에게 불리하지 않았다. 우선 6대 총선에서 그를 도왔던 ‘가락종친회’ 회원들이 7대 총선에서는 김씨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면서 ‘14표에 맺힌 원한 이번에는 풀어주자’라는 구호로 울산 전역을 누비면서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 주었다.

김씨는 이때 선거사무실을 성남동 제일여관에 차려놓고 우석에 대한 분풀이로 최영근 후보 보다는 설 후보 공략에 더욱 집중했다.

지금까지도 울산시민들 사이에 회자되는 ‘3奇 7癌’을 김씨가 폭로해 우석을 당황케 한 것이 이 때다. 김씨는 울산초등학교 유세장에서 울산에 기이한 사람 3명이 우석의 권력을 등에 업고 요직에 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7명이 우석의 비호 아래 울산 발전을 망치고 있다면서 비난했다.

당시 울산의 중심지였던 중구는 울산이 시로 승격된 후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도로 확장 등 도시계획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도시개발을 밀어붙여 ‘인간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3대 최병한 시장이 중구를 관통하는 7번 국도를 확장키로 하고 이에 대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7번 국도 인근에 많은 부동산을 갖고 있던 일부 울산인사들이 자신의 땅이 도로로 편입되는 것을 반대해 이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

김씨가 이 발언을 한 후 울산시민들 중 ‘3기 7암’이 누구일까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직까지도 이들의 실체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씨의 이 폭로는 우석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어 우석이 나중에 이에 대해 사과를 정식으로 했다. 1978년 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우석은 울산초등학교 유세장에서 김씨의 이 발언과 관련 “내가 서울에서 중앙정치에만 관심을 두다보니 과거 울산 유지들 중 나를 내세워 개인적 영리를 취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미안하다”면서 용서를 구했다.

7대 총선은 김씨가 출마할 경우 설 후보 당선이 쉽지 않았는데 이를 안 우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석이 꺼낸 카드가 김씨의 중도사퇴였다. 김씨가 선거유세 중 자의반 타의반으로 납치되었던 곳이 울주군 웅촌면 석천에 있었던 우석의 별장 육석정이었다. 타계 1년 전 울산에 와 당시 상황을 자세히 밝혔던 김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제가 한창 우석을 비난하는 발언을 유세장에서 할 때 우석 측근들이 나를 납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 돌았는데 어느 날 우석 측 젊은이들이 나에게 오더니 ‘실장님이 웅촌에서 선생님을 기다리시는데 같이 가자’고 합디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우석을 만나 6대 총선에서 내가 낙선한 것도 억울한데 이번 선거에서 왜 공천하지 않았는지 따지고 싶어 순순히 그 청년들을 따랐습니다. 내가 별장으로 들어가니 1층 응접실에 경호원들이 4~5명 있었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실장님이 2층에서 주무시고 있는데 잠시 기다리시면 나오실 것입니다’고 해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 우석이 가운을 걸치고 응접실에 나타났습니다. 우석은 자리에 앉더니 담배를 물면서 ‘이번 선거는 김 후보가 아무리 용을 써도 설 후보가 당선되니 김 후보가 사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고 정중히 말했습니다. 이 때 내가 우석의 무례한 행동에 얼마나 화가 났던지 ‘도대체 이 실장이 나와 무슨 철천지원수가 되어 이렇게 선거운동마저 자유롭게 못하도록 막느냐’고 고함을 치면서 탁자 위에 있던 재떨이를 던지려고 했더니 경호원들이 말렸습니다. 우석은 이런 나의 행동에는 미동도 않고 빙그레 웃더니 일단 나를 자신의 별장으로 억지로 오게 한 것은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각하가 이번 울산 선거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공화당 후보인 설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면서 내가 물러나면 선거가 끝난 후 각하에게 부탁해 내무부 장관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더 고집을 부려보아야 쓸데없다는 것을 깨닫고 장관 자리를 직접 각하가 보장해 주면 사퇴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우석은 경호원들에게 각하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진해 별장에 있다는 것을 안 우석이 다음날 진해로 가자고 해 군부대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진해로 가 박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이 때 박 대통령은 우석이 제안했던 내무부 장관은 행정경험이 있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신 농림부 장관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해 수락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외에도 이 때 우석이 내놓았던 당근이 내가 그 동안 쓴 선거자금을 전액 보상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우석은 내가 사퇴 후에는 설 후보 선거운동을 적극 도울 것을 요청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 김씨는 설 후보 지원금 명목으로 많은 돈을 받았다. 이 돈에 대한 관리는 당시 김씨의 선거사무장이었던 손 모씨가 했다.

손씨는 처음 이 돈을 금호여관에 보관했으나 김씨 사퇴에 따른 당원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들을 경주 불국사 호텔로 데리고 가 사흘 밤낮을 먹고 마시면서 이 돈을 모두 탕진했다.

김씨가 사퇴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곳이 병영합동유세장이었다. 단상에서 김씨가 울면서 사퇴를 선언하자 가장 충격을 받았던 인물이 최영근 후보였다. 6대 총선에서 14표차로 당선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던 최 후보는 이 선거에서 압승할 생각으로 뛰었으나 김씨의 사퇴로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합동 유세가 끝난 뒤 김씨를 위로하기 위해 찾았던 최 후보는 김씨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우석이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김씨와 그의 선거운동원들은 성남동 신한장 여관에 설 후보 지원본부를 차려 놓고 중앙정보부의 감시하에 설 후보를 돕는 선거운동을 펼쳤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요즘은 있을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선거 때면 상대방 후보에 회유되거나 매수되는 일이 잦았다. 당시 최 후보의 선거 연사로 명연설을 했던 권 모씨의 경우 선거 유세를 하면서 설 후보의 조상 설총이 신라 무열왕 때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생아라면서 설 후보를 비난해 청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권 모씨는 나중에 설 후보 선거운동원에게 매수돼 많은 돈을 받은 후 울산을 떠나 타 지역으로 갔다. 선거과정에서 최 후보를 배신했던 권 모씨는 나중에 목사가 되어 울산으로 다시 와 자신의 행동을 속죄하면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해방 직전인 1943년 북구의 달천 광산개발에 참여했고 해방 후에는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서울에서 경희대학 전신인 신흥대학까지 졸업한 후 이화여대 출신의 부인과 결혼했던 김씨는 이처럼 울산 총선에서 풍파를 일으킨 후 재산만 날리고 말았다.

물론 7대 총선사퇴를 조건으로 우석과 박 대통령이 그에게 약속한 장관 자리는 돌아오지 않아 8대 총선에서도 오기 출마를 했다. 그러나 이 때는 주민들마저 외면해 다시 서울로 가 85세에 영면한 후 고향인 강동에 수목장으로 묻혔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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