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뒤 플라자 호텔 앞 도로는
수면이 맑게 닦인 호수 같다
붉은 신호등이 차들의 침범을 막아 서울
한복판에 3분간 딱
켜져 있는 호수
그 위를 잠자리 한 마리가
공중에 필기체를 휘갈기며 날아간다
가는 꼬리에 뽀글뽀글 가득 찬 저
낳고 싶다는 본능이, 겨우 물로 매끼한 정도의
수심 2mm의 호수에 혹했다
저쪽 횡단보도엔 벌써
파란 등이 이쪽으로 건너오겠다는 듯 깜박거리고 이제
10초 후면 배때기에 타이어 자국 새기며 사라질 호수
-중략-
소공로에서 좌회전 대기하고 있던 개들이 풀려나와
덮쳐버린다

▲ 엄계옥 시인

이 시는 비오는 거리, 신호등 앞에서 신호가 바뀔 3분 동안의 이야기다. 비가 온 뒤의 차도는 미끌미끌 잘 닦인 거울 같다. 화자는 도로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호수로 본 것이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2㎜도 안되지만 그 곳은 우주를 들이고도 남을 깊이다. 잘 닦여 번들거리는 물웅덩이 낯에 혹해서 잠자리가 왔다. 잠자리와 호수의 성애(性愛)로 해서 번잡한 거리는 지금 딱 3분간 정지 중이다. 잠자리가 물웅덩이에 알을 낳는 듯한 포즈를 S자로, 6자로 재밌게 표현했다. 그 곳에 알을 낳고 싶다는 잠자리의 욕망이 지구를 떠받치는 힘이라고. 이윽고 땡, 하고 정지 신호가 풀리면 호수와 잠자리의 사랑도 차바퀴에 뭉개지고 만다. 대기하고 있던 차들이 풀려나와 호수를 덮쳐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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