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를 무대로 중국과 일본의 외교전이 불붙고 있다.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새 행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외교 공백을 보이는 동남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다.

이곳은 연간 물동량이 5조 달러(약 5997조 원)에 이르는 남중국해를 끼고 있는 데다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의 경제 성장 속도도 가팔라 세계 경제와 안보 측면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1일 필리핀 대통령궁에 따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12~13일 필리핀을 방문,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어 양국 협력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지난해 6월 말 취임한 두테르테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외국 원수들 가운데 필리핀을 찾은 것은 아베 총리가 처음이다.

양국 정상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해법과 경제협력 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동중국해에서 벌어지는 중국 폭격기와 군함 등의 ‘무력시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본은 중국 견제를 위한 우군으로 필리핀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지원책을 내놓을 것으로 관측된다.

아베 총리는 13일 두테르테 대통령의 고향이자 정치적 터전인 필리핀 남부 다바오시 방문을 자청하는 등 이번 방문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10월 두테르테 대통령의 일본 방문 당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국제법에 따라 해결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일본 순시선 제공과 해상자위대 연습기 대여 등 각종 지원을 내놓았다.

이에 두테르테 대통령은 일본을 ‘형제보다 더 가까운 특별한 친구’라고 부르며 친밀감을 표했다.

아베 총리는 필리핀에 이어 호주, 인도네시아, 베트남 정상과 사흘 연속 회담을 할 계획이다.

14일에는 맬컴 턴불 호주 총리를, 15일에는 조코 위도도(일명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각각 만난다.

특히 보고르 대통령궁에서 열릴 예정인 조코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해양 안보협력 강화와 경제 개발 관련 협력 확대 문제가 중점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2015년 인도네시아 고속철도 건설사업 수주 경쟁에서 중국에 밀려 고배를 마신 이래 대규모 차관 지원을 앞세워 파팀반 신항(新港) 개발 사업을 따내는 등 동남아 최대 시장인 인도네시아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견제해 왔다.

이번 회담에서는 총사업비 9조원 규모의 자카르타~수라바야 준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공동연구 협약이 체결되며, 말루쿠 제도의 천연가스전 개발 사업 등도 의제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16일에는 베트남을 방문해 응우옌 쑤언 푹 총리 등 베트남 국가지도부와 경제·방위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보호무역주의 때문에 폐기 위기에 놓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문제가 대화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TPP 발효를 위한 베트남의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이 크다.

TPP 최대 수혜국으로 꼽혔던 베트남은 그동안 이를 무기로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였지만, 지금은 TPP 폐기에 따른 후폭풍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일각에선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TPP의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일본은 마땅찮게 여겨 왔다.

아베 총리는 이에 더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당사국인 베트남에 적극적인 방위 지원을 약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베 총리는 작년 9월 라오스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 기간에 푹 총리와 만나 남중국해 순찰을 돕기 위해 기존에 제공한 중고 순시선 6척과 별개로 신형 순시선을 추가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이 이처럼 미국을 대신해 중국 견제 행보를 하는 가운데 중국 역시 동남아 우호세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베트남 권력서열 1위인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은 아베 총리의 필리핀 방문일인 12일 중국으로 향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의 초청에 따른 것으로, 남중국해 영유권 사태와 경제협력 방안 등이 의제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양측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악화를 막으려고 2002년 중국과 아세안이 채택한 ‘남중국해 분쟁 당사국 행동선언’(DOC)과 관련, 후속조치로 구속력 있는 이행 방안을 담은 행동수칙(COC)을 서둘러 제정하자는데 의견을 같이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측은 RCEP와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등 자국 주도의 세계 경제질서 재편에 베트남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고 지원을 약속할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시 주석은 작년 10월 말 중국으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를 초청, 정상회담을 하고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공고히 하기로 했다.

당시 양국은 340억 달러(약 40조 원) 규모의 투자협정을 체결했다. 말레이시아는 중국으로부터 해군 초계함 4척을 사기로 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을 방문한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중국으로부터 투자협정 체결 등 240억 달러(약 28조 원) 규모의 ‘경협 보따리’를 받았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방중 기간에 미국과의 경제·군사적 ‘결별’을 선언하며 중국의 환대에 부응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관련, 필리핀이 이긴 국제중재 판결의 이행을 중국에 압박하지 않는 등 친중 노선을 걷고 있다.

이를 놓고 필리핀과 베트남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몸값을 높이는 ‘양다리 외교’를 통해 실리를 챙긴다는 평가도 나온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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