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창호 극작가

가벌이, 화를 푸시게. 을병이, 자네도 왔구먼. 파쟁이, 미안하네. 말달리, 쭉 들이키게. 미도참, 을보서리, 구병무라, 한잔 주게. 보라국, 고자국, 골포국 전사들아 모두 한잔하게나. 따른 술잔을 허공에 부딪치던 물계자가 벼락(칼)을 뽑아들고 칼춤을 추니 그의 눈에 보이는 혼령들이 함께 춤판을 벌였지. 그를 지켜보던 아내가 나섰어. 여보, 여긴 아무도 없어요. 그만 집으로 가요. 물계자는 아내에게 말했지. 내가 지은 죗값을 받고 있을 뿐 귀신 들린 게 아니오. 봉두난발의 이 노인은 거문고를 타며 회한의 노래를 불렀지. 바다가 울어 성난 물결/ 야윈 밤중에 온 땅 뒤집어/ 미르가 짓나니/ 구비를 치나니/ 벼락아 너는 아느냐/ 사나이의 아픈 가슴을.

신라 제10대 내해이사금 때 물계자는 청년들을 모아 나라를 위해 힘써 싸웠지. 주변국에서 자주 변경을 침범해 왔거든. 태자 날음과 장군 일벌이 여덟 나라를 다 항복시켰는데 물계자의 공훈이 으뜸이었지. 그러나 표창은 태자에게 돌아갔어. 이 싸움의 공은 스승뿐인데 상을 주지않는다고 제자들이 태자를 원망하자, 물계자는 이사금의 뜻이 그런 걸 태자를 원망해선 안 된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이 부당함을 이사금께 아뢰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제자들이 말했지. 그는 공을 자랑하고 자기를 앞세우려고 남을 가리는 것은 선비가 할 바가 아니니 때를 기다리자고 했어.

서기 220년 경, 골포국 등 세 나라가 침범해 오자 이사금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물리쳤겠다. 물계자가 물리친 적병의 수가 많았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말하지 않았어. 물계자는 아내에게 말했지. 이사금이 위태로울 땐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할 때엔 절의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는 것을 충이라 했소. 보라(나주)국과 싸울 때엔 이사금이 위태로움에 빠졌었소. 나는 일찍이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불충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오. 제자들에게 공을 돌려 상을 받게 하고 저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으로 들어가거든. 산속에서 거문고를 타며 곡조를 짓고 살상 행위를 뉘우치며 다시는 시끄러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단다.

장창호 극작가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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