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4)7대 총선과 설두하

▲ 국회의원이 되기 전 방어진 중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던 설두하씨(앞줄 왼쪽 다섯번째)가 졸업을 앞둔 제1회 졸업생들과 함께 교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7대총선에서 우석 이후락이 설두하씨를 공화당 후보로 천거한 것은 교육자로 설씨가 울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방 학생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기고 출신이었던 설 후보는 교육자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모범을 보였다. 그는 풍금을 잘 탔고 ‘울산시민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운동도 좋아해 검도 3단으로 교육자로 활동하는 동안 검도를 통해 정신 수양을 했다.

그는 교육자로 모범을 보였지만 능력 있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지역현안은 물론이고 상임위 배정, 3선 개헌에서 우석과 적지 않은 마찰을 보였다.

우석은 설 후보를 출마시키기 위해 공화당 입당을 시킨 후 울산시지구당 사무국장자리를 맡겼다. 사무국장 자리가 공천을 위한 사전포석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

교육자로 잔뼈가 굵었던 설 후보는 정치와 무관해 이런 성격이 선거운동 때부터 나타났다. 6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최영근 후보에게 14표차로 낙선한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었던 공화당 울산시지구당은 7대 총선에서는 우석의 지원 아래 전 당원이 설 후보의 당선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설 후보 측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울산의 골수 야당 인사였던 조덕구씨를 회유해 공화당 선거운동원으로 데리고 온 것은 이 때문이다. 조씨는 설 후보를 위해 마이크를 잡기 전까지만 해도 매일 성남동에 있었던 명다방과 가로수 다방을 돌면서 하루 종일 신문을 읽은 후 공화당의 실정을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인지 그는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의 설 후보 선거운동원으로 열심히 뛰었지만 유신 때는 야당 인사로 분류, 보안사로 연행돼 엄청난 고문을 받아야 했다.

우석의 지원으로 당선했지만
후보시절 선거운동 하지않고
당선후엔 우석과 의견 달리해
‘삼선개헌 반대’ 서명운동도 참여
8대 총선때는 아예 공천 탈락
울산서 조용히 살다 1980년 영면

중앙당 역시 이때 이미 3선 개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의 지원을 위해 직접 선거유세장에 나타나는 등 올인했다.

박 대통령의 유세 참여는 공화당 후보의 당락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각 후보들은 대통령의 방문을 학수고대했다. 특히 지방 후보들은 박 대통령에게 유세장에서 지역사업과 관련된 공약을 해 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대통령 측근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실제로 선거 일주일 전인 1967년 6월1일 전국 유세에 나섰던 박 대통령은 경주와 포항 등 경북 지역의 많은 후보들이 자신의 지역구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람에 불국사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도 울산 유세장에는 나타나지 못했다.

이것이 미안했던지 박 대통령은 설 후보에게 울산을 방문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친서를 보내었다. 이 친서는 당시 박 대통령을 수행했던 우석이 직접 설 후보에게 전달했지만 정작 설 후보는 이 친서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중앙당과 당원들이 선거일선에서 이처럼 총력을 기울인데 반해 설 후보는 출마만 해 놓고 선거운동은 하지 않았다.

당원들이 선거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하면 “선거운동은 평소 해야지 선거 때라고 따로 운동을 하는 일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면서 당원들의 권유를 뿌리쳤다. 이 때문에 선거운동은 그의 아들 설성재씨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설 후보가 당원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한 유일한 선거운동이 염색이었다. 선거 당시 이미 칠순을 바라보았던 설 후보는 머리가 새어 야당의 최영근 후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였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이 젊고 기백있게 보이기 위해서는 염색을 해야 한다고 권유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설 후보는 당선 후에도 우석의 도움을 받았다. 7대 총선은 공화당이 지나치게 관권 선거를 하다 보니 당선자가 너무 많아 야당으로부터 부정선거를 했다는 호된 비판을 받았다. 야당은 이를 빌미로 등원을 거부해 공화당이 난처하게 되었다.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은 131개 지역구에서 103명을 당선시켜 전국구 27석을 포함 130석을 획득했다.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지역구 27석, 전국구 17석 등 44석을 얻는데 그쳤다.

이 때 공화당은 야당을 달래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부정선거가 나타난 지역의 당선자에 대해 제명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했다. 중앙당은 울산에서도 대리 투표 14건이 발견된 것을 빌미로 설 후보를 제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도 우석이 나서 설 후보를 보호했다.

설후보는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근검·절약으로 모범을 보였다. 국회의원 대부분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출퇴근 하면서 호의호식 했지만, 그는 국회에서 가까운 청진동의 허름한 동원여관에서 머물렀다. 이마저 지역민들이 밤낮 없이 찾아와 여관이 소란해지자 용두동으로 이사했다. 전세금 100만원을 주고 셋방을 얻었던 그는 이곳에서 의원생활을 마쳤다.

원내 활동에서 우석과 부딪힌 것은 상임위 배정 때였다. 우석은 울산이 공업도시인 점을 감안 설 후보가 상공위원이 되기를 원했지만, 이를 외면하고 자신의 전문분야인 문공위를 택했다.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여당 의원이면서 정부의 잘못된 교육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해 당 내 눈총을 받았고 우석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국회 속기록에는 설 후보가 벌인 뚜렷한 의정활동이 없다. 단지 1969년 9월 큰 홍수로 박 대통령이 민심 무마차원에서 부산으로 와 극동 호텔에 투숙했을 때 박 대통령을 수행해 수해 대책을 함께 협의했다고 되어 있다.

1970년 2월에는 그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활동했던 우석이 일본대사로 떠나기 전 서울의 신문회관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한일관계에 대한 연설을 했다. 우석은 이 연설에서 급변하는 동남아 정세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상대를 위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 연설에 설 후보가 참석해 우석을 격려했다.

이 연설에 앞서 우석은 울산으로 와 기자들을 만났다. 성남동 대구식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던 우석은 이 자리에서 자신이 계획 추진했던 공업단지 울산을 완성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한 후 “비록 몸은 일본에 있지만 당초 정부차원에서 계획했던 공업단지 울산이 울산항을 중심으로 임해공단으로 차질 없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우석은 일본 대사로 간 지 8개월 만에 중앙정보부장으로 돌아와 공업단지 울산과 관련된 현안을 챙겨 울산시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설 후보가 우석을 가장 크게 실망 시킨 것이 삼선개헌 반대 참여였다. 7대 총선에서 개헌 숫자를 확보한 공화당은 총선 후 개헌을 추진하더니 결국 1969년에는 박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을 입법했다. 이 중심에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우석이 있었다.

공화당 내에서도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찮았다. 특히 당시 공화당의 정구영 의장은 3선 개헌 반대에 앞장서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당내에서 조차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이 많아지자 박 대통령은 이들을 개별적으로 직접 만나 회유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야당 의원들도 3선 개헌으로 박 대통령이 다시 대통령이 되면 이 땅에서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는 선거가 없어진다면서 결사반대했다. 이처럼 개헌 문제가 시끄러울 때 자신의 천거로 국회의원이 되었던 설 후보가 정구영 의장 편에 서서 개헌반대 서명운동에 참여했으니 우석의 실망이 컸을 수밖에 없다.

공화당은 1969년 9월14일 새벽 날치기로 3선 개헌을 통과시켰고 7대 대선에서는 박 대통령이 다시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 여망을 무시하고 유신쿠데타까지 일으켰던 박 대통령은 결국 10·26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우석의 권유로 본의 아니게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후 풍파를 겪어야 했던 설 후보는 8대 총선 때는 아예 공천에서 탈락되었다. 이후 울산에서 조용히 살았던 그는 1980년 12월 영면했다. 유언도 소박해 “울산공동묘지에 친구들이 많으니 그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지금까지 울산공동묘지에서 잠자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9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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