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굴조사 완료된 영축사지 위상과 의미

▲ 영축사지 유물

울산 영축사(靈鷲寺)는 통일신라시대 지방 사찰 중 규모와 형식으로 봤을때 가장 격조 높게 지어진 사찰로 꼽힌다. 통일신라시대 영축산(현 문수산) 중턱에 위치했던 영축사는 천년 전 찬란하게 꽃피웠던 울산지역 불교문화를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있다.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법화경을 설파했던 곳 ‘영축산’의 지명을 따 이름붙여진 울산 영축산(영축사)은 <삼국유사>에서 불교유적지가 모여있는 경주의 남산보다 언급이 많이 될 정도로 영험하고 신령한 곳으로 여겨졌다.

해상무역 활발하던 시절
신라 울산의 위상 밝혀져
경주 불국사·황룡사 동급

당시만 해도 지금의 문수산은 영축산으로 불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에 영축산 중턱에 영축사가 만들어졌으며 후에 조선시대에 들어 영축산의 지명은 문수산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지금 통도사가 있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일대의 지명이 조선 말기에 취서산에서 영축산으로 정착된다.

▲ 가람 배치.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 관장은 “조선시대에만 ‘영축산’이란 명칭이 전국적으로 7~8곳에서 사용됐다. 이에 울산에서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문수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며 “그러면서 울산이 갖고 있던 영축산이란 지명이 양산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계에 따르면 울산은 통일신라시대 수도인 경주(금성)에 이어 해상무역을 담당하는 항구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울산 영축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이 먼 뱃길에 나서기 전 찾아 무사귀환을 바라며 불공을 드리는 곳이자, 원효대사의 스승인 낭지스님 등 당대 고승들이 수행을 하던 명망 높은 사찰이었다. 이처럼 해상무역이 활발하던 시절에 울산이 신라에서 차지했던 위상이 이번 영축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보다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울산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영축사는 당시 불교문화의 정수가 반영돼 완성도 높고 규격화된 형식으로 지어졌다. 산중턱에 일정 규모 이상의 정형화된 사찰을 만들기 위해서는 산을 깎아 절터를 만드는 등 대규모의 인력이 투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지방 사찰 중 최초로 회랑으로 구획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가람(伽藍·스님들이 한데 모여서 수행 생활을 하는 장소)으로 만들어졌다. 신라시대 가람배치의 가장 발전된 마지막 형식으로 지어진 영축사와 비교할 수 있는 사찰로는 경주의 불국사, 황룡사, 감은사 정도를 꼽을 수 있다고 영축사지 발굴팀은 설명했다.

서영남 울산박물관 발굴팀장은 “신라시대 수도인 경주를 제외하고는 지방에서 영축사 정도의 격조 높은 사찰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가치가 높은 사찰”이라며 “영축사는 고려시대 말 몽고항쟁 때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존망시기와 관련해 보다 정확한 조사와 보존·복원 작업 등이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우사기자 woos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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