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라영 화가·미술학 박사

돈과 권력이 사회를 계급화하고 있다. 업적에 급급한 정책들은 좋은 것을 지키지 못하고 소멸시켜 버린다. 내용 없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 자꾸 생겨나 혼란스럽다. 오늘날을 살아내면서 옛날을 돌이켜보면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했던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지만 정신이 풍요로웠던 그런 시절. 어떤 장면인지 그려보라고 한다면 구체적인 어떤 장면이 떠오르지 않지만, 그 느낌은 배자명 작가의 그림같은 것이 아닐까. 배작가는 자신의 유년시절 기억을 화면에 담아내면서 함께 그 시절을 경험해온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낸다. 시장풍경, 골목길, 담벼락 등의 소재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사람사는 이야기’다.

‘올해의 작가 기증작품전’(울산문화예술회관, 2월28일까지)에서 배작가의 ‘88장식’이라는 타이틀의 작품을 대면할 수 있었다. 색색깔의 지붕들 가운데 화면에 표시돼 있지 않지만 ‘88장식’이라는 상호를 가진 가게가 있음을 짐작케한다. 그 작은 지물포는 바로 작가 아버지의 흔적이며 작품에서 유난히 시장풍경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 ‘88장식’ 한지에 수간채색, 2015년

작가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이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한지에 수간채색으로 전통 한국화의 채색기법으로 표현돼 있다. 색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담담함을 잘 유지하고 있고, 배경의 적절한 농담처리는 화면이 꽉 차 보이지 않고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전체적인 색감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사는 이야기의 내용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리운 것들, 그 그리운 기억들을 화면 위에 꺼내 놓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기라영 화가·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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