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생명의 강 태화강
도심속 회귀하천…신라 무역항구…조선시대 나루터…되살아난 생명의 강

▲ 울산시와 경상일보사가 실시한 울산관광전국사진공모전(2005~2014) 출품작품들. 울산의 역사문화와 맥을 같이한 태화강을 배경으로 해마다 수많은 작품이 출품돼 눈길을 모았다.

이병록‘태화강풍경(5회)

연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천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신비로운 부름에 응하듯 삶의 여정 후엔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물줄기를 찾아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연어가 돌아오는 우리나라 16곳 하천 중 도심 속에 있는 회귀하천은 태화강 뿐이다. 이렇듯 태화강이 생명의 강으로 거듭나기까지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강물과 함께 흘러갔다.

선사인들이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 삶의 터전을 이룬 곳은 강가이다. 물에서 양식을 얻고 물을 이용해 맹수나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태화강은 사람들에게 농경수요 생명수였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태화강은 무역항구의 역할을 하느라 쉴 새 없이 흘러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의 명승 자장율사가 중국 태화지에서 만난 신인의 명을 따르기 위해 귀국하는데 이 곳이 바로 지금의 반구동 일대인 사포라는 곳이다. 중국에서 들어 온 배가 당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이 아닌 울산에 입항한 것이다. 또한 반구동에서는 2006년 아파트 신축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 결과 망루를 비롯해 다양한 건물의 목책과 목주 등 항만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됐다. 이는 신라시대 울산이 대외무역의 거점 역할을 했음을 증명해 준다.

물질적 풍요속 정신적 빈곤의 시대
태화강 상징적 발원지 쌀바위 설화
쌀 대신 물로 ‘고픈 마음’ 달래줘
‘상선약수’의 의미 되새기게 해

조선시대 태화강에는 월진도, 삼산도, 내황도 세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훗날 다리가 놓이고 처녀 뱃사공이란 말은 노래 가사에서나 찾아 볼 수 있게 되지만 나룻배의 노 젓는 소리는 강을 휘감아 전해져 온다. 월진도 근처에는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은월봉과 그 아래로 장춘오라는 언덕이 있었다.

▲ 박지영 ‘운하속의 울산(7회)

장춘오는 추운 겨울에도 풀들이 돋아 있고 꽃들이 피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제철에 봄을 감추어 두었다가 겨울에 자랑한다는 의미이다. 은월봉과 장춘오, 건너편 절벽위의 태화루까지 더해진 절경 속으로 태화강은 무심히도 흘러갔다.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듯 아름다운 풍경을 시샘한 것일까 태화강엔 수많은 백성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조선시대 가장 힘들고 긴 전쟁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임진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오년이란 긴 세월에도 끝을 못보고 다시 일본이 쳐들어 왔으니 이를 일컬어 정유재란이라 했다. 정유재란의 막바지 1597년 12월 22일, 조명연합군은 학성공원으로 알려진 울산왜성에서 왜군을 상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다.

▲ 정성주 ‘도시의숲(7회)

왜군은 막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버텼고 조선의 백성이자 의병들은 마지막 남은 심지를 불 싸지르듯 내 나라를 지키려했다. 이 전투는 1598년 1월4일까지 이어졌으며 양측 사상자만 1만명이 넘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강을 붉게 물들여도 그저 시린 가슴을 안고 역사 속으로 흘러갔다.

그 때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 지 한줌 흙바람과 그 바람에 흐르는 물소리는 한 선비의 발길을 부여잡는다.

누각은 없어져도 강물은 절로 흐르네
앞에는 넓은 들판이 열렸고
뭇 봉우리가 둘러서서 머리를 조아리네
전해오는 옛 이야기에 감회도 많은데
왜란 겪은지 몇 해나 흘러갔나?
오랜 세월 흥폐의 일이 아득하기만 하여
오늘 옛터에서 문득 수심이 생겨나네

울산 사림 신재순 선생의 ‘태화강가 태화루’라는 시다. 그의 문집 <약산일고>에 실려있다. 신재순 선생은 조선 헌종때 사람으로 누각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은 태화루에서 천년세월의 허망함을 달래셨으리라.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울산은 특정 공업지구로 지정되었다. 그 후 인구의 유입이 빠르게 진행되어 당시 10만이었던 인구는 1990년대 중반에는 100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사용하고 버린 생활하수와 오폐수는 태화강을 병들게 하였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는 죽음의 강으로 변해갔다.

▲ 손기남 ‘태화강의전경(7회)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었기에 지자체와 울산 시민이 하나가 되어 태화강 살리기에 들어가 2004년 에코폴리스 울산 선언과 2005년 태화강 마스터플랜을 내걸었다. 먼저 강과 바다로 유입되는 환경오염원을 차단하기 위해 하수처리장을 건설하고, 4000㎞에 이르는 하수관거를 정비했다. 삭막한 강둑과 호안의 콘크리트 덩어리를 과감히 걷어내고 정비하여 맑은 물이 흐르게 했다. 노력 끝에 1급수 생명의 강이 되어 돌아온 태화강은 7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도심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다.

태화강은 두 번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 6·25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의 부흥을 이루어 냈으며 죽음의 강에서 생명의 강으로 부활하는 또 한 번의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똑! 똑! 1241m의 가지산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한 스님이 지극정성으로 기도 드린 끝에 바위에서 쌀이 떨어졌다. 신기하게도 찾아오는 사람들의 양 만큼 꼭 그만큼 쌀이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더 많은 쌀을 구하기 위해 구멍을 넓힌다. 그러자 구멍에서 쌀은 나오지 않고 물이 흘러 나왔다. 그 물이 태화강을 이루고 그 이야기가 전해져 가지산 쌀바위는 태화강의 발원지로 상징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혹자는 이 설화의 속뜻이 인간의 욕심을 꾸짖음에 있다고 하지만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요즘 사람들은 쌀이 없어 배고픈 삶을 사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바쁜 일상 속에 지쳐 허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그야말로 마음이 고픈 삶을 살아간다. 이 고픈 마음을 달래라고 쌀바위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것은 아닐까? 노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上善)은 물처럼 사는 것(若水)이란 뜻이다.

청명한 하늘 아래 강물은 흘러가고 또 앞으로도 흘러갈 것이다. 역사와 더불어 말이다.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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