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울산읍성(蔚山邑城) 제1편 -조선의 개국과 울산의 변화

▲ 계변성과 고읍성의 추정범위.

1392년 조선이 개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지역 이름은 여전히 ‘울주(蔚州)’였다. 그리고 태조6년(1397) 1월 왜구가 울주에 들어와 고을의 수령을 잡아가고 1개월 뒤에 송환한 일이 발생하였다. <태조실록> 11권, 태조6년(1397) 1월3일에는 ‘왜구(倭寇)의 괴수 상전(相田)과 어중(於中) 등이 울주포(蔚州浦)로 들어온 것을 지주사(知州事) 이은(李殷)이 식량을 주고 후히 접대하였더니, 오히려 이은(李殷)과 반인(伴人) 박청(朴靑), 기관(記官) 이예(李藝) 등을 잡아서 돌아갔다’고 돼 있다. 같은 해 2월9일에는 ‘왜인이 전 판사(判事) 위충(魏种)과 지울주사(知蔚州事) 이은(李殷) 등을 돌려보내었다’는 내용도 있다. 두 기록을 보면 당시 울산 지역이 왜적과 상시 대치하고 있고, 고을 수령의 관직이 ‘지울주사(知蔚州事)’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려초기 ‘흥려부(興麗府)’에서 ‘공화현(恭化縣)’으로 바뀌었다가, 결국 ‘울주(蔚州)’로 바뀐 당시의 지명을 반영한 관직명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13년 명칭 정비
울산 지명 ‘울주→울산’ 변경되고
수령 관직 ‘지울주사→지울산군사’

수령의 역할에도 변화
울산에 ‘진’이라는 군대 설치되고
수장 진병마사가 수령 지군사 겸직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 옮겨와
군대·군관청과 행정관청 공존 초래
울산군 행정부만 ‘고읍성’ 머물기로

이렇던 ‘울주’의 지명은 태종6년(1406)을 계기로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태종실록> 12권, 태종6년(1406) 7월25일의 기사에 ‘본조(本朝, 조선)의 외방에 고을을 설치한 제도를 안찰(按察)하건대, 계림부(鷄林府)·영해부(寧海府)는 명칭이 같으나 관품(官品)이 같지 아니하고, 울주(蔚州)·흥해군(興海郡)은 모두 지관(知官)으로 관품은 같으나 명칭이 같지 않습니다…옛 제도(古制)가 아닙니다…도호부(都護府)와 소부(小府)는 지주(知州)로 개칭하고, 종전의 지주(知州)는 지군(知郡)으로 개칭하고, 감무(監務)는 현령(縣令)으로 개칭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지명이 고려시대의 것이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부(府), 주(州), 군(郡) 등이 붙어 있는 지명의 경우, 파견하는 고을 수령의 관품(官品)과 지명이 일치하지 않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많아서 개정할 필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 1417년 울산읍성 축성과 더불어 경상좌병영이 들어온 과정.

특히 울주와 영해군이 같은 관품이라 하였으니 당시 울주는 ‘군(郡)’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의가 있고 7년 뒤에 전국의 지명은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태종실록> 26권, 태종13년(1413) 10월15일 ‘드디어 완산을 다시 전주라고 칭하고, 계림을 다시 경주라고 칭하고…각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무릇 군(郡)·현(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라는 내용에 따라 당시 ‘울주(蔚州)’도 ‘울산(蔚山)’으로 바뀌었고, 고을 수령의 관직(官職)도 ‘지울주사(知蔚州事)’에서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를 겪는 가운데 당시 고을을 다스리고 관할하던 수령의 역할도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태종실록> 30권, 태종1년(1415) 9월21일 기사의 ‘전시귀(田時貴)를 울산진 병마사(蔚山鎭兵馬使) 및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로 삼았으니, 사천·울산이 진(鎭)으로 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내용은 울산에 진(鎭)이라는 군대가 설치되고 그 수장으로써 진병마사(鎭兵馬使)가 있게 되었고, 또 고을 수령인 지군사(知郡事)도 겸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 때문에 진(鎭)의 군대가 머물고 행정치소가 들어 갈 수 있는 보다 큰 읍성(邑城)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울산의 읍성은 이첨(李詹)이 기록한 <고읍성기(古邑城記)>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고려 우왕11년(1385)에 쌓은 고읍성(古邑城)이 있었는데, 이 성(城)은 신라 계변성(戒邊城, 일명 신학성, 학성)의 서쪽에 돌로 쌓은 것으로 그 둘레가 315보(步), 즉 400m 정도에 불과했다. 군대와 행정치소시설 및 관원이 모두 머물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들어 새로운 울산읍성의 축성이 최초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태종실록> 32권, 태종16년(1416) 10월10일 기사 중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이사청(李士淸)이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 전시귀(田時貴)…등과 더불어 울산군성(蔚山郡城, 울산읍성)을 감독하여 쌓았는데, 두어 달이 못 되어 무너졌다’는 기록처럼 축성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당시 읍성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또 언제 완공되었는지에 대해 실록의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태종17년(1417) 병영성을 돌로 쌓았다’는 기록, <태종실록> 33권, 태종17년(1417) 1월21일 기사의 ‘경상좌도 도절제사(慶尙左道 都節制使)의 군영(軍營)을 울산군(蔚山郡)에 옮겼다’는 기록, <여지도서(1765)>와 <영남영지, 좌병영부사례(1894)>에 ‘영락15년(1417) 경상좌병영을 울주성(蔚州城)으로 옮겼다’는 기록 등을 종합해 보면, 1416년 지금의 병영성이 있는 곳에 울산진성(蔚山鎭城) 겸 울산읍성(蔚山邑城)을 쌓기 시작했고, 두어 달 만에 무너졌다가 다시 쌓아 1417년에 경상좌도병영성으로 완공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옮겨오면서 울산진은 병마절도사영에 흡수되었고, 울산읍성은 완공했으나,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갖지 못하고 경상좌도병영성이 되어 버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묘한 상황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 안에 거대한 병마절도사영의 군대·군행정 관청과 함께 울산군의 행정 관청이 함께 있어야 하는 불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때문에 울산군의 행정부는 병영성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이전의 고읍성(1385년에 쌓은 것)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세종실록> 30권, 세종7년(1425) 10월18일의 기사에는 ‘병사(兵使)는 말하기를, 내상(內廂, 즉 병영)의 새로운 성(城)이 이미 크게 수축되었으니 반드시 울산군을 합쳐 넣어야 하겠으며 그래야만 관리와 백성들을 보호해 지킬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본군의 군수 물자 창고도 이미 새 성안으로 옮겼는데 관리와 백성들은 지금까지 편히 살던 곳이라 옮기기를 어려워해서 아직도 구성(舊城, 즉 고읍성)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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